[백일장]

    한국의 맛이 그리워질 때면

    작품내용

    더블린에서 살아가는 주인공 민영은 한국을 그리워하는 날이 많습니다. 그럴 때 평소 즐겨하는 요리를 하여 홀로 한식을 만들고 한식당을 찾아가는 등의 행동을 통해 마음을 위로하고 그리움을 달랩니다. 가족조차 이해해주지 못하는 외로움 속에서, 한식을 통해 치유 받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결국 이러한 주인공 민영의 진심이 와 닿아 한국인이 아닌 가족에게도 한식의 즐거움을 알릴 수 있게 됩니다. 사람에게 위로받지 못할 때,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는 ‘한국의 맛’을 써보고 싶은 마음에서 이러한 스토리를 서술했습니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아이의 머리칼 사이로 은은한 곡물 빵의 향이 배어났다. 민영이 아이의 머리맡 가까이 숨을 들이쉬니 고소한 빵의 기운과 함께 마른 땀 냄새가 감돌았다. 시선을 내리니 아이의 손아귀엔 먹다 남은 소다빵 조각이 욱여 쥔 채였다. 민영은 빵 조각을 슬며시 빼어낸 후, 아이의 머리칼을 연신 쓸었다. 일곱 살배기 아들의 이름은 준호였다. 준호야, 나긋이 소리 내어 발음하는 순간 꼭 어린 시절 갖고 놀던 마론 인형 같은 아이의 머리색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준호의 머리색은 숯같이 검은 민영의 머리색과 달리 노란빛이 도는 갈색을 띠고 있었다. 그랬다. 나의 아들 준호는 머리색부터 시작하여 모든 부분에서 남편을 쏙 빼닮은 아이였다.

    한국을 떠나 타지 생활을 시작한 것이 올해로 8년이 넘었다. 한국인 민영이 이방인 생활에 발을 디뎌나간 곳은 더블린이었다. 왜 이곳이었냐 묻는다면 예상하다시피 남편이 아일랜드계 사람이었다. 남편은 태어난 직후부터 성년기까지의 기나긴 시간을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으니 결혼 이후,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오게 됐다. 

    결혼 전, 민영은 워킹홀리데이로 호주와 영국에 각 1년씩 머물렀다. 소질을 살려 따둔 한식을 비롯한 일식, 양식 등의 자격증은 민영의 밥벌이를 순조롭게 도와준 요인들이었다. 더블린에 정착한 후, 아이를 낳으며 다니던 일식 전문집의 매니저를 관둬야 했다. 그렇지만 요리까지 관둘 수는 없었다. 민영은 타국에서 한국이 그리워질 때마다 가까운 한인마트에 달려가 양념장과 식재료들을 사와 한식을 만들었다. 어떤 한식이든 기본적으로 쓰이는 김치는 겨울철마다 직접 담았다. 양념이 깃든 배추를 큼직하게 썰어 보글보글 끓어대는 사골육수 속으로 밀어 넣는 김치찌개의 맛은 어설프게나마 한국의 맛을 떠올릴 수 있었다. 

    민영은 오늘도 한식을 만들 생각이었다. 잠든 준호를 확인한 후, 냉장고를 열어 작년 겨울철에 담고 유용하게 먹고 있는 김치 통을 꺼내들었다. 아이가 깨지 않게 신경을 곤두서며 냄비에 불을 올렸다. 육수가 우려지는 동안 감자와 양파, 대파, 그리고 김치를 썰기 시작했다. 민영은 준호가 특히 좋아하는 감자를 큼직하게 썰어 넣었다. 부어 넣은 재료가 점점 끓기 시작하자 아까 미리 준비해둔 밀가루 반죽을 꺼내 얇게 늘여주며 떼어 넣는다. 민영은 불 조절에 유념하며 국물의 간을 보았다. 멸치 국물이 고소하게 우러난 간에 김치의 얼큰함까지 가져간 수제비였다. 한국에서는 매년 겨울철 별미로 김치 수제비를 잔뜩 끓여 먹었다. 더 어린 시절에는 커다란 솥에 동생들과 함께 엉겨 붙어 반죽 뜯는 맛으로 수제비 맛을 즐겼다. 

    아주 오래전에는 평생을 한국에서 살다 죽겠다 싶었다. 그래서 호주와 영국에서 지내던 시절에도 남들이 겪는 그 흔한 향수병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어차피 한 해가 지나면 돌아갈 곳, 왜 그리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한식의 맛에 애타하는지 몰랐다. 그랬던 스스로가 타향살이를 시작하고 이곳에 뼈를 묻고 살게 생겼다. 그래서 민영은 뒤늦게 요리를 해야 했다. 일터에서 잡생각 들 생각 없이 바쁘게 만들던 요리가 아닌 홀로 그리움을 덜어내려 만드는 한식이었다. 

    물론 한식을 만든다 하더라도 완연한 고향의 맛을 낼 수는 없었다. 맛은 같다 할지라도, 한국에서 한상 가득 둘러앉아 비좁게 먹던 그런 그림, 외롭지 않은 마음, 공기마저 다른 한국의 부엌 냄새를 그대로 재현해 내기는 어려웠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무엇을 먹더라도 음식은 본고장에서 먹어야 제대로 먹는 것이라고 하지 않나. 그래서 민영에게 한국의 맛은 특별했다. 특별해서 사무친 그리움을 안겨주었고 그녀의 걸음을 부엌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줄곧 8년을 그리 살았다.

    초저녁을 넘어설 때쯤 아이가 일어났다. 늘 같은 시간대쯤 낮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민영은 때맞춰 수제비를 데울 수 있었다. 집안엔 칼칼한 향이 곳곳에 퍼졌다. 준호가 원목식탁에 앉자마자 평소와 달리 어기적거렸다. 아까 먹던 빵을 찾는 기색이다. 

    “빵은 아까 다 먹었잖아.” “그럼 닭고기 먹을래. 김치 먹기 싫어.”

    준호가 짧은 손가락으로 제 앞에 놓인 수제비 그릇을 가리켰다. 이건 수제비야, 쫀득쫀득 네 입맛에 제격일 것이라는 민영의 꼬드김에도 준호는 절대로 넘어가지 않는다. 어린이 입맛에 맞게 만든 것인데 아예 먹지 않겠다는 선언에 민영은 힘이 빠졌다. 준호가 평소 한식을 입에 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요즘 따라 입맛이 점점 확고해지는지 의사가 뚜렷하다. 

    “할 수 없지. 그럼 저녁은 스튜로 먹자.”

    민영은 어제 먹다 남은 양고기와 당근, 감자를 넣고 끓인 아일랜드 식 스튜를 데워왔다. 아이는 보기 좋은 먹성을 보였다. 잘 먹는 모습이 흐뭇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성스레 끓인 수제비가 떠올라 못내 아쉬웠다. 민영은 저라도 먹어야겠다 싶어 아이가 거들떠보지 않는 김치 수제비 그릇을 끌어왔다. 입속으로 뜨끈하며 시원한 기운이 올라왔다. 준호 입맛에 맞춰서인지 어른 입맛에는 턱없이 싱거운 애매모호한 맛이었다. 그래도 남길 수가 없어 꿋꿋이 쫀득한 아기 수제비들을 씹어냈다. 

    남편은 밤 9시가 넘어 돌아왔다. 리처드는 광고 회사 아트디렉터로 일한 지 오래였다. 그는 어김없이 준호의 방에 들어가 곤히 잠든 모습을 확인하고는 타이를 풀며 거실로 나왔다. 민영은 밥을 먹겠냐고 물었고 남편은 고개를 저으며 부엌 가를 응시했다.

    “혹시 한국 요리했어?”

    역시나 그의 예민한 후각이 발동했다. 민영이 그렇다고 하자 리처드는 ‘흐음’ 입소리를 내며 척 보기에도 거칠한 턱을 매만졌다.

    “한식은 이제 밖에서 사 먹고 오는 게 좋겠어.”

    당황한 민영의 표정을 읽은 리처드가 뒤늦게 애써 웃고는 뒷말을 수습했다.

    “뭐든지 식당이 전문적으로 잘 하니까.”“한식당 가면 비싸니까 손이 가도 직접 하는 거야, 준호도 같이 먹고.” “당신, 준호가 아니라 크리스. 애 이름은 정확해야지. 준호라는 이름, 집에서도 이제 그만 써. 그리고 여기서 나고 자란 크리스는 아무래도 한식보다는 아일랜드식이 입에 잘 맞을 거야.” 

    때때로 남편은 민영의 마음 따위는 모래성 무너뜨리는 놀이쯤으로 아는 듯했다. 견고한 모래성을 헝클어뜨리는 악의 없는 아이의 손길처럼, 자신의 마음을 헤집는 리처드의 말들이 제게는 상처였다. 남편은 고단한 얼굴로 민영의 어깨를 쓰다듬고는 할 일을 끝냈다는 듯 욕실로 들어가 굳게 문을 닫았다. 아까 전 한참 동안 환기를 해도 집안 곳곳 빠지지 않던 김치의 향이 어느새 전부 빠져 있었다. 

    이튿날이었다. 민영은 준호를 등교시킨 후,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 더블린 시내로 나왔다. 더블린은 일 년 중 서늘함이 주를 이루는 도시였다. 추위를 많이 타는 민영에게는 유독 그렇게 느껴졌다. 웅장함이 느껴지는 석조 건물들을 여럿 채 지나고 템플 바를 거치면 민영이 자주 가는 한식당이 나왔다. 오픈 시간에 맞추어 한적할 때 배를 채우고 나올 생각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아침도 거르고 발걸음 했다. 아일랜드 식 건물과 레스토랑, 마켓들 사이로 자리한 식당은 생각보다 이 그림에 잘 섞여들어 있었다. 간판이 큼지막한 영어로 써놓았기 때문일까. 겨우 10시였는데 아침으로 외식을 나온 이들이 제법 되었다. 동양인으로 보이는 이들이 많았지만 한식을 찾아온 현지 사람들도 몇 테이블 보였다.

    민영은 된장찌개와 조기구이 세트를 주문했다. 이곳의 주인장은 한식당을 영업한지 햇수로 15년이 넘었다고 들었다. 아주 가끔 와본 곳이었지만 분위기는 여전했다. 위장을 자극하는 매콤한 냄새와 감칠맛 도는 밑반찬들, 그리고 어렴풋이 들려와 꽂히는 한국어들. 이곳에 올 때면 테이블 너머로 들리는 말들이 그토록 듣고 싶은 언어였다는 것을 실감한다. 민영은 이방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이 지친다고 느낄 때, 이곳에 올 수밖에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이곳에서 찌개를 먹는 순간에는 외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 주인아주머니는 곧 한상 가득 음식을 차려오셨다. 

    “여행 오셨나 보네, 한국 분이세요?” 아주머니의 시선이 기다리던 중 읽고 있던 한국소설 표지를 훑고 떨어졌다. 적어도 일 년에 네 번 이상은 왔다. 참고 참다가 계절이 지날 때마다 한국의 맛이 그리워 견딜 수 없을 때, 한 번씩 틈을 내서 왔다. 그래도 아주머니는 민영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싶었다. 민영은 고개를 저으며 더블린에 거주한다고 답했다. 

    “아이고, 여기 사는 한국 분들은 비싸다고 잘 안 오는데. 만들어 먹기나 하지 여긴 거의 관광 온 손님들이에요.” “그렇구나, 전 가끔 와요. 집에서 해먹어도 한국 냄새가 그리워질 때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한국에서 해먹는 느낌은 완전히 안 나더라고. 다들 그래요, 특히 한국 사람들이 귀신같이 알아채요. 맛은 보장하는데 먹는 공간의 추억까지는 어떻게 하지 못하겠더라고요.”

    꽤나 오랜만에 한국말을 내뱉었다. 꽤나 오래 쓰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모국어는 흡사 자동반사기처럼 튀어나왔다. 마음은 조금이라도 아주머니를 붙잡고 얘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저 너머 테이블에서 다른 손님이 호출기를 눌렀기에 주인장은 금세 걸음을 돌렸다. 

    민영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찌개를 한 숟갈 떴다. 여린 식감의 두부와 호박이 된장국물과 함께 입안에서 으스러졌다. 민영은 하얀 쌀밥을 크게 퍼서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외국인들을 상대로 하는 식당이었기에 한국 식당의 찌개만큼 자극적인 맛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고 정말로 집 밥을 먹는 기분이었다. 민영은 야들야들한 조기의 하얀 살을 들어 올려 젓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알찬 살들이 공깃밥 위에 얹어졌다. 

    입이 짧은 민영은 오랜만에 밥 두 공기를 먹었다. 메인메뉴와 함께 나온 밑반찬들이 입맛을 돋우는데 일조한 공이 컸다. 씹는 맛이 제격인 고소한 진미채볶음과 수육이 먹고 싶어지는 무말랭이, 고춧가루에 버무린 콩나물무침까지 모두 완벽했다. 더블린 시내 한식당은 가격이 저렴한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민자의 발걸음이 쉽지 않았고 대부분의 손님은 유럽식의 끼니에 질려 한식이 다급해진 관광객들이었다. 그래도 잘 왔다 싶었다. 

    민영은 밥그릇에 붙은 밥알 하나까지 잘게 씹어가며 창가에 비치는 행인들을 물끄러미 보았다. 늘 저렇게 앞만 보고 달려왔다. 가족을 위해서, 타지에서 적응해야 하는 자신을 위해서.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의 욕구는 뒷전으로 여기었다. 민영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언젠가 작은 한식당을 열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왔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곳이 아닌, 자신과 같이 외로운 삶에서 한식을 통해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이방인들을 위하고 싶었다. 그럴 수 있는 날이 그리 멀지 않기를 바랐다.

    “생각날 때 언제든 와요.”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는 아주머니가 넌지시 건네는 말이 민영을 웃음 짓게 만들었다.

    “가족 데리고 오면 좋고.” “네..”

    민영이 멋쩍게 고개를 숙이고 가게를 나왔다. 더블린에 왔던 당시에, 1년간은 남편도 한식을 즐겼다. 집에서도 그랬고 같이 외식을 나오는 일도 잦았다. 그랬던 그가 크리스가 자라면서 조금씩 한국의 것들을 기피하기 시작했다. 그는 크리스에게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주지 말아야 할 것을 늘 주의했다. 리처드는 생각보다 편협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고 아이가 완전히 클 때까지는 자문화에 대한 사고의 뿌리가 심어져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리처드는 본래 한식의 정갈함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는 정말로 민영이 해준 떡볶이, 비빔밥, 김밥 등을 가장 맛있게 먹었다. ‘한국인은 밥심’이라는 말까지 가장 좋아하던 사람이었기에 이렇게 달라졌다는 게 가끔은 믿기지 않았다. 

    자주는 아니라도, 아주 가끔은 한국에 대해 말해주고 싶었다. 나의 아이 크리스에게 말이다. 크리스, 엄마가 태어난 나라에서는 이런 음식을 먹었어. 큰 상을 펴고 갖가지 반찬과 함께 늘 올라오는 찌개. 엄마는 그런 순간들이 그리워질 것을 상상도 못했단다. 널찍한 냄비에 온 가족이 달그락 수저를 부딪쳐가며 국물을 들이켜던 순간들 말이야. 그때는 그게 지긋지긋하게만 느껴졌었는데 이제는 그러고 싶어져. 우리 가족이 모여 오순도순 찌개를 먹는 식사 말이야. 

    어느새 집 앞에 다다르고 있었다. 더블린 시내를 지나 한적한 길목으로 접어들면 외관부터 낙후된 느낌의 저층 아파트가 나온다. 더블린의 중심가는 아니었지만 이래 봬도 시세는 우습지 않은 곳이다. 이제는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민영은 녹이 슨 아파트 정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일랜드 나이로 초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아이는 3시를 넘기지 않고 스쿨버스로 하교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스콘을 야무지게 먹던 준호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꾸깃꾸깃해진 종이를 내밀었다. 며칠 후 있을 아이들의 작은 행사에 학부모들과 함께 요리하는 시간을 갖겠다는 안내문이었다. 시간적 여유가 있는 학부모들은 참석해달라는 권유의 문장이 간결하게 쓰여 있었다. 유독 아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학부모와 함께하는 특별 수업이 꾸준히 있었다. 수업은 다음 주 화요일, 각자 특색 있는 요리를 생각해 재료를 준비하란 말이 굵은 글씨로 강조되어 있었다.

    “크리스, 엄마가 무슨 요리 해줬으면 좋겠니? 네가 좋아하는 애플파이? 아니면 친구들하고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케밥은 어때.”

    준호는 뭐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싫어. 그런 거 말고 한국 음식 해줘.”

    준호의 답에 누구보다 놀란 민영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아이는 한 번도 한식을 먼저 찾은 적이 없을뿐더러 입도 짧았다. 갑자기 먹고 싶어진 것은 아닐 테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표정은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아이의 입매를 지그시 응시하던 민영은 어느새 답을 찾아버렸다. 학부모와 친구들이 한데 모인 자리에서 남들보다 특별한 음식을 하고 싶은 것이다. 아이에게는 은근한 자랑거리를 삼고 싶은 대상이 이색적인 한식이었다.

    “좋아, 엄마가 무슨 요리해줄까?”

    준호는 엄마가 원하는 것을 골라달라고 말했다. 이렇게라도 아이가 한식을 요청했다는 게 제법 고마운 일이었다. 준호 또래의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한국요리는 뭐가 좋을까, 민영은 벌써부터 음식 선정의 난제를 즐겁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화요일 오후, 민영은 큰 가방에 요리에 필요한 재료들을 가득 채웠다. 조리 기구는 학교 조리실에서 마련해준다 하였기에 식재료들만 챙겨 가면 되었다. 용기에 담은 잘 썰어놓은 김치와 베이컨, 대파와 고추들이 에코백 안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부침가루와 설탕도 빠지지 않고 챙겼다. 걸어서 20분이 넘는 거리를 운동 삼아 걸었다. 준호가 마음에 들어 할 만한 요리를 해내고 싶었다. 강을 지나고 붉은색의 관광버스 서너 대를 지나쳤다. 민영은 발밑을 부스럭대는 단풍잎들을 바삭바삭 밟으며 묘하게 끓는 긴장감을 억눌렀다. 학교 외부는 포레스트 스쿨 같은 분위기가 물씬했다. 연두색으로 페인트칠 된 건물의 외부를 휘감은 담쟁이넝쿨은 친환경적인 풍경을 조성했다. 

    벌써 모인 준호네 반 아이들과 열 명을 훌쩍 넘는 학부모들이 운동장에서 무언가 준비 중이었다. 잔디밭에 두어 줄로 앉아있는 아이들은 부모들의 등장에 들뜬 기색을 감출 줄 몰라 했다. 얼마 되지 않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준호의 시선이 민영과 맞닿았다. 혹여 엄마가 오지 않을까 싶은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이의 눈망울에 안도감이 서려왔다. 민영은 환히 웃으며 천 가방을 흔들었다.

    민영은 잘게 썰어온 속 재료들을 한데 모아 고춧가루와 설탕으로 양념했다. 스테인리스 볼 안에 담긴 재료들을 섞어 비비며, 가져온 부침가루와 냉수를 부어 본격적인 반죽을 준비했다. 민영은 어느 때보다 자신의 요리 과정에 눈을 밝히며 지켜보는 준호를 불렀다. 기다렸다는 듯 잰걸음으로 달려오는 아이의 손에 나무주걱을 맡겼다. 아이는 반죽 그릇이 엎어질까 노심초사하는 표정으로 자그마한 손을 펴 그릇을 붙잡았다. 민영은 제 손 크기의 반도 되지 않는 아이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붙였다. 포개어진 손이 아이가 반죽에 열중할 수 있게 도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다른 테이블에서 맛깔스러운 냄새가 풍겨왔다. 어떤 집은 터키 식 케밥을, 어떤 집은 이탈리안 파스타를, 그 외에도 아일랜드에서 평소 즐겨 먹는 스튜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만드는 집도 있었다. 다른 집들도 아이가 붙어 가족 구성원 모두가 요리에 참여하고 있었다.

    반죽이 어느 정도 묽게 완성되자, 민영은 가스버너에 위에 팬을 올렸다. 기름을 두르려는데 잠자코 지켜보던 준호가 이번에도 자신이 하겠다고 손을 내민다. 민영은 준호의 팔이 팬에 닿지 않게 조심시키며 용기 위로 기름을 뿌렸다. 준호는 식용유로 커다란 하트 모양을 냈다.  뜨겁게 달궈질 때쯤, 반죽을 올려 펼쳤다. 중불에서 반죽이 바짝 익어가며 뒤집을 시간이 되자 주변 사람들이 고소한 냄새에 힐끔 관심을 주기 시작했다.

    “진짜 맛있는 냄새네요. 이거 뭐예요? 팬케이크? 매콤한 냄새가 나요.”

    옆 테이블에서 버거를 만들던 벨라의 엄마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김치 부침개를 응시했다. 어느새 부침개는 기름과 함께 보기만 해도 바삭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아니요, 한국 요리에요. 김치로 만든 부침개에요.”

    민영의 답변에 벨라 엄마는 완성되면 먹어봐도 되겠냐며 열띤 환호를 보였다. 옆에 있던 소녀 벨라도 덩달아 준호네 요리가 궁금해진 모양이었다. 민영은 조금만 기다려 달라 했다. 곧이어 다른 집 테이블에서도 준호네 요리가 신기한 듯 달려와 이것저것 묻고는 돌아갔다. 다들 구수한 향이 식욕을 자극하는 모양이었다. 궁금하긴 하지만 저편에서 시큰둥한 눈빛으로 넌지시 바라보고 마는 집들도 있었다. 요리를 마친 후, 담임인 스텔라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각 요리들이 널찍한 테이블 위에 일렬로 올려졌다. 천방지축인 아이들은 잔디 위를 뛰어다니며 알 수 없는 흥분을 표출했다. 스텔라 선생님은 그런 아이들을 진정시킨 후 각 요리에 대한 설명을 부탁했다. 

    다른 집들이 나와서 발표를 하는 동안, 민영도 준호의 손을 잡고 긴장되는 마음을 다독였다. 한식자격증 시험을 보던 날도 그리 떨리지는 않았는데. 한식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다수인 곳에서 대표로 나와 설명해야 하는 자리가 부담감을 안겨줬다. 몇 차례 이후 선생님이 민영과 준호를 부르자, 민영은 마른침을 삼키며 부침개가 담긴 그릇 뒤로 섰다.

    “이건 한국의 김치를 이용해 만든 부침개입니다. 부침개는 흡사 팬케이크와 비슷한 느낌일 수 있는데 그것보다 더 고소하고 바삭한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어요. 한국에서는 비가 올 때 많은 사람들이 부침개를 찾곤 합니다. 아이들이 있어서 제가 매운맛을 줄이고 베이컨도 함께 넣어 요리했어요. 이따 드실 때, 나이프로 잘라 드시지 말고 꼭 젓가락으로 찢어 드셔야 제맛이 날 거예요.”

    민영의 설명 후 박수갈채가 나오던 중, 잔디밭에 앉아있던 한 아이가 불쑥 끼어들었다.

    “아일랜드 박스티 아니에요?”

    박스티는 아일랜드 식 감자전을 일컫는 말이었다. 아이의 눈에는 생전 처음 보는 김치 부침개와 같아 보일 수 있었다.

    “맞아요, 그래 보일 수 있는데 박스티는 감자를 이용해 만든 음식이에요. 주로 크림이나 소스와 곁들여서 먹고요. 하지만 김치 부침개는 별다른 양념장 없이도 풍미를 느낄 수 있는 음식이에요. 무엇보다 한국의 전통 음식인 ‘김치’가 들어갔다는 것이 포인트고요.”

    민영의 손을 꼭 붙들고 있는 준호는 무슨 내용인지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그저 엄마가 자랑스러운지 입매를 씰룩댔다. 시식 시간이 되자, 너 나 할 것 없이 테이블로 달려와 각 요리들을 맛보았다. 채 오 분도 되지 않아 깔끔히 비워진 그릇 때문에 민영은 다시 가스버너에 불을 올려야 했다. 그날 민영은 다섯 차례의 부침개를 만들고 레시피를 묻는 캐나다계인 제이미 엄마에게 요리법을 전수했다.

    한국에서 만 킬로 가까이 떨어진 곳에서 한국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한식을 먹는다는 게 새삼 놀라웠다. 바삭한 부분을 공략하는 아이들의 손짓마저 귀여웠다. 더블린에서 한식을 요리했던 날들 중, 가장 즐거운 날이었다. 학교 마당 전체에 서서히 퍼져나가는 고소한 반죽 냄새가 찬바람에 섞여들었다. 저 멀리 참나무를 지나쳐 온 바람의 물결이 민영의 얼굴을 스쳤다. 준호가 민영의 상체를 끌어당겨 귀엣말을 속닥인다.

    “나 내일 김치 수제비 해줘. 그거 먹어보고 싶어.”
    오늘은 더블린에 온 이후로 처음으로 적요함을 느끼지 못한 날이었다. 어쩐지 올해의 겨울은 마음이 춥지 않을 듯했다. 민영은 아이의 재촉 어린 요구에 고개를 끄덕였다. 온갖 음식 냄새가 가시지 않은 드넓은 운동장 속에서 코끝으로 느껴지는 민영의 요리 냄새가 유난히 짙었다.

  • 최우수상

    한국의 맛이
    그리워질 때면

    한주연

  • [백일장]

    긴 수염 새우

    작품내용

    해물탕에 들어가는 여러 해삼물 중 새우가 내는 맛을 떠올리며 창작했다. 감상포인트는 새우에 대한 묘사에 담긴 비장미와 골계미이다. 즉, 비장한 느낌과 웃음을 동시에 주려는 게 이 작품의 목적이다.

    입 꾹 다물고 버티다
    껍데기만 남긴 조개도
    이쑤시개 같은
    뼈 한 조각 남긴 오징어도
    다 떠난 뚝배기 그릇에
    홀로 드러누워
    일어날 줄 모르는 노인
    허리는 굽었어도 
    바다를 꿈꾸던 어린 시절의
    붉은 홍조는 아직 잃지 않았다

    식어버린 뚝배기 속에서
    몸뚱이보다도 길게 뻗친 두 가닥
    해물탕이 그저 그런 잡탕이 될까봐
    흩어져버릴지 모를 맛을 묶으려고 
    준비했던 단단한 끈 
    탄력은 아직 죽지 않았다

    진한 국물 우려내느라
    기력이 다 풀려버렸다 해도
    너무 섧게 모로 눕지는 마라
    해물탕이 끓는 동안 
    진해진 빛깔로 육수에 수를 놓았고
    얼큰하기만 했을 고춧가루 맛을
    긴 수염으로 바로잡아줬다

    비록 먼 바다를 향했던
    꿈은 여기까지더라도
    해물탕을 먹은 이라면
    바다가 허락한 진국을 기억하리니
    깊은 맛 속에서 헤엄치며
    자신만의 닻을 들어 올렸던
    긴 수염 새우여    

  • 우수상

    긴 수염 새우

    홍윤기

  • [백일장]

    뼈대 있는 입맛

    작품내용

    우리 집 가풍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엄마의 정성과 손맛 그리고 음식, 대를 잇는 한식에 대한 사랑을 나의 소소한 일상 에피소드 7가지 통해 친근감있게 접근하고 싶었다. 엄마, 남편, 아이, 그리고 친구와의 사이에서 음식이 얼마나 중요한 매개가 되는지 음식은 즐거움이요 사랑이라는 것을 실제 겪은 이야기로 엮어 보았다.

        "아기가 이런 것도 먹어요?"   "어머 애가 이걸 먹네."   우리 애를 키우며 종종 들었던 말이다. 13살 초등학생 아들은 어른들이 좋아하는 개인기가 있다. 특히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 특급으로 인정해주시는 그 개인기는 뭇 사람들이 토속적인 또는 시골 음식이라 칭하는 음식을 잘 먹는 것이다. 두 돌 지나며 헹궈준 김치를 매매(매워매워)하며 먹기 시작하더니 어린이집 들어가선 김치 대장이라고 불렸다. 급식 시간 잘 먹으니 칭찬하신 선생님 덕도 있을 테지만 집에서도 김치와 시금치나물과 따뜻한 밥이면 오물오물 맛있게 한 그릇 먹고 씩 웃는 아이였다. 바쁜 아침에 간장, 참기름, 깨소금에 따뜻한 밥을 비벼 주면 “간장밥 맛있어.”하며 뚝딱한다. 요즘에는 간장밥에서 된장밥으로 취향을 옮겨갔다. 된장이 더 구수하다나. 공부하다 간식이 필요하면 빵 대신 된장밥을 달라고 하는 놈이다. 우리 아이가 이런 특기요 취향을 가지게 된 건 다 우리 엄마, 아이의 외할머니 덕분이다.


    #1: 친정 엄마
      친정 엄마는 한식 요리사셨다. 어렸을 적 바쁜 엄마 덕에 나는 엄마의 출근 후 스스로 가방을 챙겨 동생을 데리고 등교했다. 엄마는 아침 일찍부터 깜깜해진 밤까지 일하셨지만 쉬시는 날에는 동생과 나에게 맛있는 음식을 아낌없이 해 주셨다. 그리고 엄마가 없을 때 배곯지 않도록 갖가지 반찬과 음식들을 냉장고 가득 만들어 두시곤 했다. 그래서 우리집은 늘 음식이 풍성했고 놀러 오는 친구들에게 내놓으면 좋아하며 먹었던 기억이 많다. 동생과 내가 초등학교 들어갈 즈음 엄마는 일을 그만두셨다. 그 후로는 우리집의 한식요리사가 되셔서 식구들에게 그 솜씨를 발휘하셨다. 철마다 계절에 맞는 김치와 제철 음식으로 식탁을 차려 주셨고 난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그런 음식들을 먹고 자랐다. 고3 대학입학원서를 쓰고 면접을 보기 위해 서울 고모 댁에 머무른 적이 있다. 고모는 시험 보러 상경한 조카딸에게 좋은 것을 대접해 주시려고 보쌈을 먹자고 하셨다. 내일이 면접이니 든든히 먹고 힘내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데 보쌈이 배달로 오는 것이었다. 고모가 만들어 주시는 게 아니라 전화로 주문하니까 보쌈이 오는 거였다.   ‘아, 보쌈이 배달이 되는구나.’  그날 나는 처음 알았다. 보쌈이 배달이 된다는 것을. 고모는 놀라는 나에게 너희 엄마는 다 만들어 먹이지 하시며 하하 웃으셨다.


    #2: 그 어머니에 그 딸
      결혼 후 맞벌이로 남편과 나는 가정 일도 서로 도와가며 했다. 특별히 이것은 너, 저것은 나 구분하고 약속하진 않았지만 요리가 재밌고 자신 있는 나는 음식 준비를,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남편은 청소와 설거지를 맡게 되었다.   신혼 시절, 퇴근 후 장을 보면서 집에 들어와 같이 먹을 음식을 정성껏 만들고 나면 퇴근이 늦은 남편이 들어 올 시간이랑 얼추 맞았다. 남편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 늘   “감사합니다.” “아 진짜 최고다.”하고 진심으로 맛있게 먹어 주었다. 그런 모습이 참 좋았다. 늘 퇴근하면서 오늘은 무엇을 할까가 즐거운 고민거리였다. 우리 아버지는 어머니의 음식을 아무 말씀 없이 드시거나 혹은 짜다 싱겁다 평을 하면서 드셨는데 남편은 언제나 ‘맛있다. 최고다.’ 해 주니 참 기분이 좋았다. 한 번은   “자기는 어쩜 그렇게 말을 예쁘게 해? 뭐가 그리 고마워?”하고 물으니   “누가 이렇게 해 줘? 내 친구들 아침밥은 굶고 다니고 저녁은 사 먹고 들어가는 애들 많아. 난 당신이 아침도 차려 주고 저녁도 차려 주니 너무 고맙지. 그런데 너무 신경은 쓰지마.”  하는 거다. 가족들 밥 먹게 해 주는게 내가 할 일이라...그런건데.  오늘도 남편은 식사 후 잘 먹었다 하며 설거지를 맡고 커피를 내려 대령한다. 난 남편의 반응에 오늘도 사랑을 느낀다. 맛있게 먹어 주는, 만드는 수고를 감사해하는 가족들이 있어 나는 내일 먹거리를 계획해 본다. 그 어머니에 그 딸 아니랄까 봐 먹고 나면 다음 끼니를 걱정하는 것도 똑 닮았다.


    #3: 냇닢 베이비 감밤이
      우리 아들 감밤이는 외할머니께 공수한 음식과 엄마의 노력 중인 음식솜씨와 그 속에서 무럭무럭 잘 자랐다. 첫 손주가 태어난 이후 개미같이 부지런한 우리 엄마는 더 바빠지셨다. 손자에게 먹일 백김치, 장아찌, 밑반찬을 만들어서 주기적으로 공급해 주시느라. 감밤이가 세 살 때 이야기다. 외할머니의 음식 된장박이 깻잎을 처음 맛 본 후 감밤이는 끼니 때마다 그걸 찾았다.   “냇잎. 냇잎.”  깻잎은 발음이 어려운지 고 작은 입으로 냇잎이라 부르며 밥 위에 올려 잘도 먹는 것이었다. 된장박이 깻잎은 특유의 감칠맛으로 밥 도둑인 건 인정~! 하지만 손도 많이 가고 숙성하는데 오래 걸려서 몇 달이나 걸려야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손주의 냇잎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너무 좋아하셨다. 친정 집의 된장박이 깻잎을 몽땅 주시며 감밤이는 역시 좋은 걸 안다고 신나하셨다. 세 살 때 이미 된장박이 깻잎의 마니아가 된 남다른 입맛의 감밤이. 그 후로 봄이면 달래간장에 구운 김, 여름이면 열무김치 쓱쓱 비빔밥, 가을이면 보글보글 청국장, 겨울이면 시원 알싸한 동치미, 냉면, 간장게장 등등 점점 더 한식의 세계를 확장해갔다. 한식만이 음식이라는 듯 지금도 피자와 햄버거를 안 먹어 친구 생일 파티가 가장 먹을 게 없다고 하는 우리 감밤이. 덕분에 냇닢 베이비 감밤이는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고 자랐다. 집집 마다 계절이 바뀌면 감기로 고생하는 아이가 많다는데 우리집은 전혀. 어쩌다 힘이 들어 지칠 때도 한밤 푹 자고 나면 회복하는 에너자이저가 되어 한식 한길 입맛 감밤이는 튼실하게 잘 자라고 있다.


    #4: 할머니는 9단 엄마는 7단
      “우리 강아지 뭐 먹고 싶어?”  친정에 가기 전에 걸려오는 전화다. 아이는 외할머니의 물음에 주저하지 않고 먹고 싶었던 음식들을 쏟아낸다.   “할머니, 꽃게탕요.”   “할머니, 불고기요.” 친정엄마와 아이의 통화에 나도 설레는 건 사실이다. 엄마의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내심 엄마께 미안하기도 해서 할머니께 해 달라고 하지 말고 집에서 엄마한테 해 달라고 해라 하니,    “엄마 꽃게탕 국물은 할머니거랑 달라. 할머니는 요리 9단이고 엄마는 7단이잖아.”  하는 거다. 엄마가 하는 걸 똑같이 따라 하는데도 왜 진한 맛은 덜 한지 도대체 모르겠다. 아이 말로는 할머니 국물은 찐득한 깊은 맛이 난단다. 몇십 년 요리하신 손맛을 어찌 따라가겠나. 포기하고 인정.  엄마는 우리 식구들이 가는 날은 어김없이 새벽 재래시장에 가셔서 신선한 재료로 골라 장 보시고 손질하고 종일 준비하신다. 그러다 힘드셔서 누워 잠시 눈붙이시고는 또 일어나 아이가 맛있게 먹도록 요리해 주신다. 엄마의 냉장고는 가히 음식점 수준으로 갖가지 채소, 과일, 고기가 채워져 있어서 주문과 동시에 원하는 음식이 나오니…….결혼 전엔 미처 몰랐지만 부엌살림 이렇게 하기가 어려운데 엄마는 그걸 당연하게 하셨구나. 내가 복이 많았구나 하고 감사한다. 우리 엄마는 역시 9단, 가족들에게 행복을 주신 고수답다. 부끄러움이 많아 엄마 아빠 외에는 목소리조차 들려주지 않는 우리 아이는 외할머니 앞에서는 까불며 애교까지 부린다. 오직 외할머니 앞에서만 말이다. 외할머니의 손맛과 사랑에 맘을 내준 첫 손자는 외할머니와의 통화에서는 거침없이 “할머니 최고! 할머니 사랑해요!”를 앵무새처럼 표현한다. 외할머니는 엄마 아빠와 동급이다. 아니 그 이상일 듯.


    #5: 한식으로 대동단결
      엄마를 닮아 솜씨도 좀 있고, 음식을 보면 어떻게 조리할지 감이 잡히는 나도 음식을 조금 하는 편이다. 그저 우리 세 식구 아침과 저녁 차리는 정도이지만 그 두 끼를 맛있게 차리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사실 아침에 밥과 국을 차려 먹는 것은 미리 준비하는 것도 일이지만 아침에 먹고 치우는 것도 시간이 꽤 걸린다. 그래서 시간은 덜 걸리지만 영양가 있는 그리스식 식단으로 아침 식사를 시도해 봤었다. 그리스식 아침 식단은 삶은 달걀, 올리브, 요구르트, 호밀빵, 토마토 또는 사과 이렇게 5가지 정도를 접시 하나에 담아 먹는 거다. 이렇게 하니 아침 시간이 여유로웠다. 조리하는데 시간이 걸리지 않으니 빠르고 또 접시 하나에 다 담아 먹으니 설거지 거리도 덜 나오고 또 한 가지 좋은 점은 음식 냄새를 가지고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사 준비를 맡은 나로서는 편했다. 처음엔 아빠와 아들도 괜찮네 하며 먹었다. 하지만 삼일 되지 않아 밥 먹고 싶다가 나오기 시작했다.   “엄마 나 그냥 밥하고 김치하고 김하고 줘.”   “여보 삶은 달걀 질린다. 된장국에 밥 말아서 간단하게 먹자.” 그렇다. 이미 한식에 길들여진 우리 입맛을 나 편하자고 하루 아침에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삼일 후 다시 우리는 한식으로 리턴즈. 오늘 아침도 맑은 순두부국에 김치와 멸치볶음으로 맛있는 냄새에 감칠맛을 더해 건강한 하루를 시작했다. 


    #6: 행복을 지켜주는 김장문화유산
      지금도 나는 엄마의 된장, 간장, 고추장, 김치, 장아찌를 공수받아 냉장고 가득 일용할 양식으로 채워놓고 산다. 일하는 딸 안타까워하시며 생선을 말려 켜켜이 정리해 주시고, 계절김치를 담으시고는 가져가라 하신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나물류의 반찬은 친정 갈 때마다 먹고 싸오기까지 하며 솔직히 기생하고 사는 처지이다. 친정에 가면 개미처럼 부엌 일하시는 엄마를 보며 왜 그리 힘들게 사시나 그러지 마시라고 하지만 다 자식들 주시려고 하는 것을...정말 정말로 이 딜레마를 어찌해야 할지.   이제 곧 김장철이다. 김장은 어른들 생신보다 더 큰 우리집 행사인 것 같다. 온 가족이 모여 1박 2일동안 치러지고 수육을 삶아 애프터 파티까지 치르니까 말이다. 엄마는 여름부터 고춧가루며 젓갈이며 좋은 것을 골라 사 쟁여두시고, 한 달 전부터 동생네에 우리 집에 날짜를 몇 번이나 확인하신다. 관절 수술로 불편해 절룩거리시는 무릎을 끌고 다니시면서도, 김장 후에는 몸살이 나서 며칠씩 드러누우셔도, 그래서 이제 그만 김장하지 말고 김치를 사 먹자고 해 봐도 소용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그 날 까지는 김치를 만들어 주겠노라는 엄마의 엄포를 아직 이길 자식이 없다. 김장하는 날은 모두 다 모여 거실에 자리를 깔고 앉아, 남자는 들고 이고를 여자들은 버무리고를 허리가 아프고 어깨가 뻐근 하도록 한다. 세 집 식구 일년 먹을 치를 한 번에 하시는 손 큰 엄마는 식당도 아니고 100포기를 절이신다. 그 100포기 중 얼마는 혼자 사시는 작은 아버지 댁에 또 얼마는 힘이 들어 김치 못 담가 먹는 이모 댁에 그리고 허리 아프신 나의 시어머니께 까지 전해진다. 물론 제일 많이 먹는 집은 아이가 셋이 동생네 그리고 다음으로 우리 집, 남은 가장 조금이 엄마와 아빠의 몫이다. 1박 2일을 수고하며 만든 김치를 집으로 가지고 와 김치 냉장고에 넣으면 만감이 교차한다.   “와 이것으로 일년을 살겠구나.”   “소중한 엄마의 김치를 올해도 또 먹는구나.”   “우리집 식구들의 맛있는 일년이 채워지는구나.”   한 해 농사 추수하는 농부의 마음이 이럴까 싶다. 김장을 담는 날은 쌍화탕까지 미리 챙겨 먹을 정도로 힘들지만 다 담그고 나서 김치를 보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태초에 인간을 만드시고 보시는 눈길이 그러하셨을까? 엄마의 진두지휘대로 우리는 배추를 나르고, 고춧가루와 젓갈을 황금비율로 맞추어 김치소를 버무리고, 간을 맞추고 한다. 또 버무린 배추를 통통마다 담고 정리하고……. 하루 종일 허리가 아프게 일하는 김장하는 날. 몇 달 만에 모인 가족들이 김장과 함께 일상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남편 흉을 보기도 하고, 자식 자랑을 하기도 하며 가족애를 나눈다. 김장이 맛있는 이유는 김치에 이런 가족의 추억까지 더해지기 때문이 아닐까? 


    #7: 음식으로 홍익인간!
      나는 친한 지인들을 가끔 집으로 초대한다. 한 끼 식사 같이 하자며. 특히 골드미스인 정선배는 나의 초대를 반가워하며 시간을 내준다. 정선배는 3년 전 유방암 수술을 하고는 많이 약해졌다. 안 그래도 혼자 살면서 외로워했는데, 독한 병에 걸려 일년을 투병하다 몸을 겨우 추스르고 일상으로 돌아온 정선배. 안쓰러운 사람이다. 정선배는 같이 조금만 산책해도 얼굴이 창백해진다. 오르막길도 아니고 산도 아닌 평평한 공원을 걷는데도 힘들어하는 선배를 보면 정말 마음이 착찹하다. 속을 터놓고 지내는 막역한 사이에 어떻게 힘이 되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건강한 음식을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우리집에 정선배를 처음 초대한 날의 메뉴는 삼계탕이었다. 원기회복에 좋은 삼계탕으로 메뉴를 정한 것이다. 토종닭에 녹두, 마늘, 양파, 황기, 대추, 은행 등을 넣어 삼계탕을 만들고, 넉넉히 마련한 삼계탕 국물에 감자, 호박, 당근, 깻잎을 다져 넣어 향기가 은은한 닭죽을 뜨끈히 차려냈다. 밑반찬으로는 슴슴한 석박지와 막 무친 봄동 겉절이를 가볍게 무쳐 내놓았고. 그 날은 수술 후 요양원에 있다가 일상으로 돌아온 첫 날이었다.    “경숙, 너무 맛있다. 힘이 나네 정말. 흑.” 선배는 웃으며 먹기 시작하다가 눈물을 보였다. 왈칵 쏟아지는 선배의 눈물에 나도 가슴이 울리고 저린다.   “언니, 내가 맛있는 거 많이 해 줄게. 우리 집에 자주 오세요. 난 요리 하는 게 참 좋고 또 맛있게 먹어 주면 즐겁고. 내 음식 먹고 언니가 힘을 내면 좋겠어요. 건강해야 늙어서도 같이 놀지.” 그 날 우리는 포도 주스로 와인잔을 채우고 언니의 회복을 위해 건배했다. 그 후로 언니는 더욱 나를 각별히 아껴주신다. 食口란게 음식을 나누어 먹는 사람이란 뜻 아닌가? 그 후로 언니와 난 김밥으로 소고기무국으로 전복구이로 육개장으로 김치찜으로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식구가 되어가고 있다. 음식으로 언니를 도울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음식으로 홍익인간을 실천하며 살려는 나의 마음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한식은 나에게 삼시 세끼 배를 채우는 음식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한식은 나에게 함께 했던 사람이었고 고마움이었고 즐거움이었고 추억이었고 그리고 사랑이었구나. 너무나 감사한 엄마 덕분에 시작된 나의 한식 솜씨는 남편에게 아이에게 가족들에게 그리고 친구에게까지 번져가 내 주변을 따뜻하게 물들이고 있다. 소소한 일상을 행복으로 채울 수 있게 나는 오늘 저녁도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으로 향한다. 11월이 제철인 꽃게가 냉장고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엄마의 찐한 꽃게탕 국물을 따라잡는 그 날이 올 거라 기대하며, 오늘 저녁은 시원한 꽃게탕으로 우리 가족을 맛있게 혼쭐내줘야지.  
       

  • 우수상

    뼈대 있는 입맛

    조경숙

  • [백일장]

    희로애락 (喜怒哀樂) 과의 동행, 한식

    작품내용

    희로애락의 순간에 즐기기 좋은 한식과 사유를 서술함 (희 : 잡채, 로 : 떡볶이, 애 : 육개장, 락 : 쌈, 그리고 대미의 장식 밥)
    사람들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유사하게 연상되는 음식들이 있을텐데, 한식에 대해 널리 알리고 즐길 수 있게 하는 스토리텔링 콘텐츠로 확대하여 활용하기 좋을 것으로 예상함 (예 : 기쁠 때, 화날 때, 슬플 때, 즐거울 때 나만의 한식 메뉴 이야기)

    “나는 먹기 위해 사는 걸까? 살기 위해 먹는 걸까?”   이 세상에 눈, 코, 입을 호강시키는 음식이 너무나도 많기에 이번엔 어떤 맛을 즐겨야 할지 고민하는 순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입맛은 떨어졌지만 기운을 내기 위해 뭐라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이런 자문을 하곤 한다.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이런 우스갯소리 같은 고민을 하는 이유는 식욕은 우리 인간의 3대 기본 욕구 중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무언가를 먹는다는 것은 단지 지금 이 순간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음식을 먹으면 각종 영양분이 신체에 흡수되어 하루하루 생활할 수 있는 에너지도 얻고, 건강을 유지하는 기틀이 잡히기도 한다. 이에 더해 음식에 담긴 의미와 맛에서 마음의 위안과 기운을 받기도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에서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다양한 감정에 빠진 상태에서 음식을 접하게 된다. 음식은 마술처럼 그 감정을 증폭하기도 하고, 다른 방향으로 전환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신비로운 경험은 개인의 인생사에 오랜 시간 여운으로 남기도 해서 특별했던 감정을 되살리기 위해 그 음식을 다시 찾는 경우도 있다. 마치 산부가 입덧으로 음식을 먹기 힘든 날에도, 꼭 특정 식당의 특정 메뉴의 음식이 생각나서 찾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한민족의 역사를 돌아보면, 한(恨)의 민족이면서도 이를 신바람 나는 분위기로 승화시켰다. 최근엔 문화·예술·정치·의료 등 사회 각 분야에서 한류(韓流)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데, 여기에 오기까지 반만년 역사 동안 숱한 외침과 재해를 이겨낸 원동력으로 한국인의 힘, 한식 밥상을 꼽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의의 희로애락(喜怒哀樂) 순간과 함께 했던 한식들은 저마다 사연이 있겠지만, 나 개인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여러 한식이 나에게 힘을 주었던 것처럼 다른 분들도 한식을 통해 즐거워지고, 미래로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희(喜) : 기쁜 일이 있을 땐 더욱 기분 좋게 하는 음식, 잡채 
    어렸을 적 명절에 친척집에 가거나 결혼식 같은 잔치 자리에 가면 평소에 못 먹던 특식을 먹을 수 있기에 마음이 들뜨고 행복했다. 잔칫상에 차려진 요리 중 첫 젓가락이 가던 음식은 열이면 아홉은 잡채였다. 당면의 부드러움과 쫄깃함, 거기에 더해진 고기와 갖은 채소의 식감, 그리고 고소한 참기름 향은 천상의 맛이었다. 어렸을 때부터의 강렬한 인상 때문인지 지금도 좋은 날 맞이하게 되는 상차림에 잡채가 없으면 허전함을 느낀다. 평일에 한창 밖에서 근무하다 점심 식사를 위해 들어간 식당에서 밑반찬으로 잡채가 보이면 내 몸 어디에선가 엔도르핀이 생성되는 느낌이 들곤 한다. 잡채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나만의 감정은 아닌 것 같다. 17세기 조선시대에 궁중연회에서 처음 선보였다고 하는 잡채는 그때부터 잔칫상에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 되었다고 하니, 한국인에게 있어 ‘기쁨’을 책임지는 대표적인 음식이 아닌가 싶다.  잡채의 원래 모습은 그 이름처럼 다양한 채소를 채 썰어 볶아서 담고 그 위에 즙액과 천초·후추·생강가루를 뿌린 것이었다고 한다. 옛 기록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것을 보면, 각종 버섯·도라지·시금치·고사리·두릅·숙주나물·미나리·오이·무 등 다양한 재료가 잡채를 만들 때 사용되었다고 하니 그 모습이 잘 상상되지는 않는다. 광해군이 주최한 궁중연회에서 첫 등장하였고, 이를 준비했던 인물이 왕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니 세상에 화려하게 선을 보였다 할 수 있다.  그 이후 오랜 기간 왕족과 양반과 같은 사회 고위층 중심으로 즐길 수 있었던 음식이었을 것이다. 한편으론 이렇게 다양한 재료가 사용된 만큼 서민들이 평상시에 모두 준비해서 만들어 먹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1900년대 초반부터 당면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저렴하게 구입이 가능한 당면이 잡채의 재료 중 메인 역할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때부터는 보통 사람들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식이 되었다. 상류층의 잔치 음식이 대중화가 되면서 보통 사람들도 기쁜 일이 있을 때 잡채를 마음껏 맛볼 수 있게 된 것을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 정신의 실천사례라고 얘기하면 너무 과한 것일까?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된다.’는 얘기도 있는데, 기쁜 일이 있을 때 더욱 기분 좋게 하는 음식인 잡채로 인해 사람들이 느끼는 기쁨의 크기가 두 배보다 더 커질 수 있게 된 것이기도 해서 올바른 방향으로 진화 발전한 것은 맞는 것 같다.  내 인생의 기쁨의 순간을 함께 했던 한 접시 수북 담긴 풍미 그 자체, 잡채. 이미 한식을 접한 외국인들이 선호하는 음식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설문조사도 있었는데, 앞으로도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를 바란다. 


    로(怒) : 화난 일이 있을 땐 속 시원히 풀어주는 한식, 떡볶이 
    무언가 계획했던 일이 잘 안 풀리거나, 이런저런 일로 스트레스를 받아 열 받는 날이 종종 있다. 이러한 날이면 화를 풀기 위해 나도 모르게 확 당기는 맛이 있다. 바로 매운맛!‘이열치열’이라 했던가? 마음속 여기저기 난 불에 맞불 작전을 벌이듯 뜨거운 불맛 음식을 먹다 보면 화가 다스려지는 것 같다. 매운맛 음식은 많지만, 어렸을 적 넉넉지 않은 주머니 사정에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떡볶이다. 학교 앞 분식점이나 포장마차의 거대한 은색 철판 안에서 보글보글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는 빨간 국물에 담긴 밀떡과 어묵은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영혼까지 당기는 매력이 있다. 학교에서 열심히 수업을 듣고 나오는 길에, 학원에서 늦은 시간까지 공부하고 나오는 길에 연두색 플라스틱 접시에 듬뿍 담긴 떡볶이를 친구와 함께 이쑤시개로 찍어먹으며 수다를 떨다 보면 어느새 하루의 피로가 풀리는 듯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로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는 길에 식사를 차려 먹기는 피곤하고, 뭔가 하루 동안 쌓인 마음의 짐을 풀어내고 싶을 땐 떡볶이가 생각나곤 한다. 어렸을 적엔 잘 도전하진 못했지만, 혀가 아릴 정도로 매운 고춧가루 맛이 느끼면 쫄깃한 떡을 먹다 보면 어느새 기분이 좋아진다. 순대, 김말이, 튀김 만두까지 취향에 따라 떡볶이 국물에 찍어 먹으면 요즘 말로 ‘텐션 업’이 제대로 된다. 게다가 데일리 와인까지 한잔 같이 하다 보면 한국과 서양 문화의 조화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한국 전통요리에 관심이 많으신 어머니는 주말에 아들내미가 집을 올 때면 좋은 음식 먹이고 싶다며, 떡볶이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궁중떡볶이를 해주실 때가 있다. 간장 베이스로 갖은 야채와 떡 등이 어우러진 모습은 격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쌀떡, 당근, 버섯, 오이, 양파, 소고기 등의 재료는 오색 찬란하고, 이들을 한 입 가득히 넣고 음미하다 보면 오감이 충족되는 듯하다. 떡볶이는 사실 처음엔 어머니가 해주신 것과 같은 형태였고, 궁중과 사대부에서나 즐기던 고급 요리였다고 한다. 가래떡 외에 전복, 해삼, 돼지고기, 소고기 등이 재료로 활용되었다고 하니 일반 서민이 쉬이 만들어 먹기 어려웠을 것이다. 고추장과 값싼 밀가루 떡이 주재료가 되고 분식장려운동의 영향을 받아서 대중화가 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떡볶이가 많은 사람들이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음식의 대명사이기도 해서 그 변화가 극적이다. 이러한 변화는 이 시대 보통사람 중 한 명으로서 매우 기쁘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스트레스를 받아 힘든 순간들이 있을 텐데, 이를 화끈하게 풀어줄 수 있는 매운맛 떡볶이를 많은 사람들이 애용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떡볶이가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한 형태로 변신을 거듭하고 있는 것도 긍정적인 모습인 것 같다. 쌀이나 밀가루 떡 그 자체도 매력적인데, 떡 안에 치즈가 들어가기도 하고, 모양이나 색깔도 다양해져서 입뿐만 아니라 눈까지 호강시킨다. 떡볶이의 맛과 외양을 더욱 다채롭게 하는 사리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전통적인 부재료인 어묵, 달걀, 면 외에 차돌, 파채, 통오징어 등이 추가로 들어가기도 한다. 소스도 간장이나 떡볶이 외에 짜장, 카레, 로제 소스가 활용되기도 한다. 화를 다스리기 위해 먹게 되었는데, 떡볶이는 만드는 이나 먹는 이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샘솟게 하는 도깨비방망이 같은 음식인 것 같다. 다양한 매운맛 떡볶이가 우리 한국인뿐만 아니라 세계인의 화를 저 멀리 날려버리고, 새로운 열정을 끌어낼 것이라 믿는다.  “오늘 혹시 가슴 답답하고 무언가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다고요?  떡볶이를 추천합니다!”


    애(哀) : 슬픈 일이 있을 땐 기운 차리고 일어서게 해주는 한식, 육개장 
    한국인은 정이 많기로 소문이 났다. 기쁨은 나누어 배로 만들고, 슬픔은 나누어 반으로 나누는 것을 적극적으로 실천한다. 타인과의 관계를 소중히 하기에 지인의 경조사를 챙기는데 많은 신경을 쓴다. 특히 슬픈 날 함께 하는 것을 더욱 중시 여긴다. 어려울 때 도움을 주는 이가 진정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전 세계를 힘들게 하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 거의 2년째 이어오고 있다 보니, 경조사를 함께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많은 분들이 아쉬워하는 것은 쉬이 볼 수 있다. 타인과의 관계를 소중히 하다 보니 어느 때보다도 슬픈 날은 가까운 이를 떠나보낸 날이다. 이런 날 접하게 되는 대표적인 한식 중 하나는 육개장이다. 우리나라 장례식장에서 조문 온 분들에게 육개장을 대접하게 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 우선 예로부터 붉은 기운은 액운을 막고 귀신의 침입을 막아준다는 믿음이 있어서 고추기름으로 빨간 국물이 베이스가 되는 육개장을 문상객에게 대접했다고 한다. 그리고 육개장은 그 시초가 몸보신을 위해 탄생한 개장국에서 유례 된 것인데, 문상을 위해 멀리서 찾아온 손님의 건강을 챙기기 위해 준비한 음식의 의미도 있다고 한다. 동방예의지국다운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 같다. 마지막은 생활의 지혜 같기도 한데, 장례식은 통상 며칠 동안 이어지다 보니, 음식들을 신선하게 보관하기 어려울 수 있어 육개장을 준비한 것이라고도 한다. 갖은양념에 푹 익힌 육개장은 잘 상하지 않고, 오래 우릴수록 깊은 맛이 올라와 먹기에도 좋다. 이는 마치 장례식장에 슬픔을 함께 하기 위해 찾아온 문상객들이 소중한 관계의 사람임을 뜻하는 것처럼, 육개장은 오래될수록 진국을 맛볼 수 있고 정성도 느껴진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어찌 보면 한스러운 일을 겪었을 때 포기하고 뒤돌아서기보다는, 어디에선가 희망의 단초를 찾아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위대한 한국인의 민족정신이 녹아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 생각 없이 먹을 때는 맛있는 음식 중 하나라 생각했는데, ‘식객’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육개장에 담긴 한민족 역사의 의미를 보고 울컥했던 기억이 있다. 영화 속에서 순종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 주권을 잃은 슬픔에 탄식하며 식음을 전폐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순종의 마음을 헤아리고 궁중에서 임금의 음식을 만들던 대령숙수는 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순종에게 육개장을 요리하여 올린다. 식음을 전폐하였던 순종은 대령숙수가 올린 육개장에 담긴 조선의 혼과 한을 깨닫고는 눈물을 흘리며 남김없이 깨끗이 비웠다고 한다. 소고기는 살아서 묵묵히 일하고 죽어서는 주인에게 육신을 남기는 소같이 성실하고 충심이 가득한 백성의 삶을, 매운맛의 고추기름은 조선의 굳센 기개를, 토란은 외세에 흔들리지 않은 강한 의지를, 고사리는 들풀처럼 끈질긴 자생력의 민초의 삶이라는 조선의 혼과 한을 의미하기에 흘린 눈물이 아닐까 싶다. 인류가 계속되는 한 우리 삶에서 슬픈 일은 언제고 겪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우리가 과거에 경험했던 고난의 역사도 다시 반복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좌절하지 말고 육개장을 먹으면서 음식의 영양분을 통해, 음식에 담긴 의미를 통해 심신의 배터리를 100%까지 채우고 일어설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세계 도처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마음의 위로를 전하면서 기운을 차릴 수 있도록 돕는 대표적인 한식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락(樂) : 먹는 것 자체가 즐거운 한식, 쌈
    평상시 먹는 백반 차림상에 쌈 하나만 추가되어도 진수성찬이 된듯한 기분이 드는 건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 같다. 쌈의 위력은 대단하다. 온갖 채소가 쌈의 재료로 사용이 가능하고, 어떤 부재료와 함께 해도 어울리기 때문에 모든 것이 정답이라고 할 만큼 다양한 조합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특히나 쌈을 좋아하셨다. 상추와 쑥갓에 김이 솔솔 올라오는 흰 밥 한 숟가락 듬뿍 올리고, 제육이나 삼겹살에 엄마표 고추장을 더해 아이 주먹 만한 쌈을 만들어 맛깔나게 드시곤 했다. 거기에 된장찌개까지 더해지면 임금님 밥상 부럽지 않게 행복해하셨다. 그 모습을 보고 자라서인지 방송 프로그램에서 “한입만~”을 외치며 쌈을 만들어 먹는 연예인의 먹방 장면을 보면 나도 모르게 아버지를 떠올리며 옛 추억에 잠길 때도 있다. 쌈채소는 정말 다양하다. 적생채, 꽃상추, 케일, 커리, 비트, 오크립, 깻잎 등 갖은 생채소를 활용할 수 있다. 고기도 돼지고기, 소고기 같은 육류뿐만 아니라, 고등어구이나 참치 통조림 같은 어류, 오리 불백 같은 조류도 모두 잘 어울리고, 여기에 마늘, 고추, 파채, 무쌈 등 뭐든 더해져도 맛있다. 장도 고추장, 된장, 쌈장도 다 좋고 취향에 따라 젓갈을 넣어도 풍미를 한껏 끌어올린다. 이 뿐만이 아니라 쌈채소가 꼭 생채소일 필요가 없다. 삶은 양배추와 호박잎도 훌륭한 쌈이 되는데, 건강에도 좋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쌈은 지역마다, 집안마다, 사람마다 개성을 살려 재미있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음식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쌈은 우리 한민족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한 음식이 아닌가 싶다.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중국 대륙, 북방민족, 바다 건너 일본 그리고 서양과 통하는 위치에 있다. 이들과 접해있으면서 만약 한쪽이 힘이 강대해지면 그쪽의 영향권 아래 속해 우리들의 본모습을 잃고 휩쓸려 갈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 영향은 받되 한민족 고유의 특성을 살리면서 조화를 이루었다. 우리의 한글, 한복, 건축물 등 문화예술 전반을 보아도 독창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주변에서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문학적 유사성과 뛰어난 과학적 특징도 가지고 있다.  음식에 있어서는 쌈이 바로 그러하다. 지금 쌈으로 즐기고 있는 재료들 중 해외에서 전파된 채소들이 많으나, 다른 재료들과 잘 어우러져 대표적인 한식으로 자리매김했다. 여러 재료들이 쌈 안에 담겨 하나가 되는데, 각각 고유의 맛을 잃지 않으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것은 아름답고 복스럽기까지 하다.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공동의 목적을 향해 서로를 따뜻하게 보듬어 준다는 느낌도 든다. 탄수화물, 단백질, 비타민 등의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할 수 있어 몸에도 좋고,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 먹을 수 있기에 과정 전체가 재미있다. 말 그래도 먹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음식. 그게 바로 쌈이 아닌가 싶다. 다른 나라에도 토르티야, 라이스페이퍼 등을 이용한 쌈 문화가 있긴 하지만, 한식 쌈이 가지고 있는 다채로움과 음식이 주는 즐거움은 더 크지 않나 생각하기에 세계에게도 널리 알려지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대미의 장식, 한국인의 밥!

    이미 메인 요리를 양껏 먹어서 잠시 벨트를 풀고 쉬어야 할 만큼 배가 부르지만 뭔가 아쉽다. 이미 앞에서 먹은 음식들 때문에 내일 아침 일어났을 때 보름달처럼 부어있을 얼굴이 고민은 되지만, 수학 공식처럼 마지막 코스를 거치지 않으면 허전한 한국인의 독특한 메뉴가 있다. 바로 볶음밥이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사귄 친구들과 외식을 하다 보면 놀라는 것 중 하나가 볶음밥 문화라고 한다. 닭 볶음탕이나 부대찌개, 감자탕, 곱창구이, 해물전골 등 무게감 있는 요리를 신나게 먹고, 라면이나 우동 사리까지 추가해서 목에 차오를 때까지 먹은 것 같아서 끝난 줄 알고 젓가락을 내려놓으려고 할 즈음, 마지막에 한두 그릇의 공깃밥을 더해서 볶음밥까지 만들어 먹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한 숟가락을 먹고 눈이 번쩍 뜨일만한 맛에 다시 한번 놀란다는 것이다. 이 어마어마한 코스는 우리에겐 익숙한 풍경이지만, 개별 요리 문화가 익숙한 외국인의 눈에는 신기해 보일 수도 있겠다 싶다.  사실 이렇게 메인 요리를 먹은 후 남은 재료를 활용한 볶음밥은 그 역사는 알기 어렵다. 어쩌면 먹을 것이 부족한 어려운 시기를 살았던 우리 선인들이 메인 요리는 조금만 맛을 보고, 남는 재료에 밥 등을 섞어서 볶아 먹어 포만감을 느끼고자 한 것이 널리 퍼진 것일 수도 있다. 잘게 썬 김치, 김가루, 계란, 참기름까지 더하면 사실 하나의 요리라 할 만큼 훌륭한 비주얼이 나타나고, 살짝 누룽지처럼 팬에 달라붙은 밥알까지 긁어먹으면 세상 부럽지 않게 행복해지기도 하다. 한국인의 힘은 밥에서 나온다고 하는데, 이 볶음밥은 그 절정인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가족 모두 이 볶음밥을 사랑한다. 탕이나 전골을 먹고 나면 남은 국물과 부재료를 활용하여 밥을 볶아 먹는다. 다른 반찬 준비하기 귀찮은 날이면 묵은 김치를 활용해 김치볶음밥을 만들고 그 위에 계란 프라이를 얹어서 먹는데, 이 별미는 자주 먹어도 물리지가 않는 마법 같은 매력이 있다. 요즘은 밀키트나 냉동식품으로 다양한 볶음밥 요리를 간편하게 먹을 수도 있는데, 맛이 훌륭하긴 하지만, 만들어 먹는 즐거움을 느낄 수는 없어 먹다 보면 아쉬움이 생기곤 한다.

    나의 희로애락과 함께 한 한식들이 다른 사람에게는 어떤 추억이 있을지 궁금하다. 사람들의 인생의 여정이 모두 다른 만큼 각자의 희로애락과 연결되는 음식들은 각양각색일 수 있다. 서로 그러한 추억들을 공유하다 보면 우리의 삶이 더욱 풍요롭게 되고, 즐거워지지 않을까 싶다. 

    - 이상 -

  • 우수상

    희로애락
    (喜怒哀樂)
    과의 동행, 한식

    임세진

  • [백일장]

    외국인 엄마의 Korean Food

    작품내용

    본 작품은 글쓴이의 경험을 바탕으로한 실화입니다. 총 4개의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는 본 작품은 서두에 ‘우리 엄마는 외국인이다.’라는 정의형 문장으로 시작하나, 작품 말미에 ‘우리 엄마는 외국인일까?’로 질문을 던지며 마무리합니다. 한식의 맛으로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던 글쓴이 모친의 삶과 에피소드들을 한식의 다양한 맛에 비유하여 표현한 작품입니다.

    “우와, 김치찌개에서 어떻게 이런 깊은 맛을 낼 수 있어?”라는 내 질문에 절대 쉽지 않은 조리법을 간단하다는 듯 설명한 뒤, “Okay? Easy, right?”라고 답하는 우리 엄마는 외국인이다.

    제 1장: 매운맛 그 알싸함이란
    추운 겨울, 걷는 동안 날숨에 안경이 뿌옇게 흐려짐에도 ‘편지가 잘 도착했을까, 두꺼운 종이 사전을 뒤적이며 적은 영어 문장에 틀린 점은 없을까, 다음 편지는 언제 올까’ 생각하던 소년이 있었다. 같은 시각, 더운 여름 나라에서는 ‘어떤 내용을 담아 답장을 보낼까’ 하며 수줍게 펜을 들었다 놨다 하던 소녀가 있었다. 그렇게 10년간 펜팔을 했던 소년과 소녀 덕분에, 우리 부모님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다. 호돌이가 풍악을 울리며 한국의 눈부신 성장을 전 세계에 보여주던 쌍팔년도 그 해, 소녀가 펜팔 10년만에 처음 한국에 왔다. 공항에 마중 나온,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크고 두꺼운 검은 뿔테안경을 끼고 있던 소년은 쑥쓰러움에 들고 있던 장미꽃마저 들고있던 책에 끼워 감추었다고 한다. 달달함을 가득 안고 소녀가 첫발을 내딛은 한국은 매운맛으로 가득했다. 언어도, 문화도 달라 매일같이 ‘매운맛’을 보고 있는데 음식마저 고추와 마늘이 잔뜩. 집안 어르신께서는 늘 커다란 항아리에서 윤기 흐르는 진득한 붉은색 소스를 주걱째 퍼오셨고, 전을 부치는 날이면 전을 찍어 먹는 간장에도 어슷썰기한 푸른 빛 고추가 동동 떠 있었다. 붉은 기 없는 음식에도 아낌없이 들어가는 마늘에 시큰거리는 코를 훌쩍이며 수북하게 다져 놓은 양에도 하루 세끼 요리를 하다 보면 어느 덧 바닥이 보였다. 깊고 진한 소녀의 눈은 한식을 배우던 초반 내내 삶과 음식의 알싸함에 눈가가 그렁그렁한 날들이 많았다고 한다.

    제 2장: 실패없는 단맛과 짠맛의 조합
    한식에는 매운맛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 선배님들 말씀처럼 단맛도, 신맛도, 짠맛도, 쓴맛도 함께 존재한다. 세월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동굴 속 석순처럼, 한국에 시집와서 다양한 맛으로 단단하게 쌓인 한식 내공은 가족을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깊은 한식의 감동을 선사하였다. 감동을 받은 ‘많은 이들’중에는 다양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이 많았다. 글쓴이는 학창시절 수년 간 한국을 떠나 있던 기간이 있었다. 당시 머물렀던 국가에 마침 한식을 테마로 한 드라마 ‘대장금’이 방영되어 온 국민의 ‘귀가알람’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저녁 7시만 되면 거리가 한산해질 정도였으니. 전교에 한국인은 글쓴이와 동생만 있었던 터라 한국문화, 한국음식에 대해 쏟아지는 질문을 받았었다. 발동동거리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답을 기다리는 눈동자들에 제대로 된 답을 하기 위해 각 메뉴에 얽힌 이야기와 조리법을 가장 많이 찾아보았던 시기였다. 해외에서의 빠른 적응의 방법으로 ‘현지화’가 많이 언급되고는 한다. 현지 음식을 잘 먹고, 현지 문화를 잘 이해하는 것과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한국스러움과 한식이 글쓴이의 현지 적응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단맛과 짠맛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메뉴는 언제나 훌륭한 분위기 메이커였다. 한류 열풍으로 어깨가 정수리 즈음 올라가 있을 때 어린 마음에 ‘우리 집에 가면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어’하며 친구들을 자주 집으로 초대했었다. 내가 직접 요리를 할 것도 아니면서.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철없는 딸로 인해 외국인 엄마는 항상 현지에서 한식 식자재를 찾느라 바빴다. 녹아 내리듯 정성스럽게 익혀진 달달하고 부드러운 갈비찜에 짭쪼름하면서도 아삭하게 톡 쏘는 배추김치나 깍두기 한 조각, 그리고 보글보글 속을 든든하게 해주는 찌개류 하나면 국적불문 양손 엄지를 내보이게 하는 귀한 손님상이 완성되었다.

    제 3장: 따뜻하게 쓴 맛 한 스푼
    이따금씩 쌉싸름한 쓴 맛이 나는 한식 메뉴가 있다. 거부감이 나는 쓴맛이 아닌, 감칠맛을 내는 건강한 쓴맛 말이다. 예를 들어, 없던 입맛을 돋우는 고추장 더덕구이, 달래된장국이나 도라지무침 같은. 본격적으로 블로그가 활성화되기 시작할 때 즈음, 십 여년 전부터 엄마는 개인 블로그에 한식 메뉴에 대한 게시글을 업로드하기 시작하셨다. 처음에는 단순히 컴퓨터를 배우고 싶어하셔서 인가 하며 문화센터 등록을 해드릴까 했는데, 알고 보니 혹시 하늘 나라로 떠났을 때 본인이 만든 음식이 그리우면 자식들이,  또 그 자식들의 자식들이 언제든 들어가서 보고 따라할 수 있도록 레시피를 한국어, 영어, 중국어로 업로드를 하기 위함이라 하셨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며 오래오래 엄마가 만든 음식을 먹을 수 있게 건강하시면 되지 않겠냐고 속상함에 되려 화를 냈었는데. 그 날 저녁반찬은 목넘김이 왜이리 쓰던지. 그렇게 시작된 엄마의 블로그는 초반에 공개 블로그로 운영 및 다양한 언어로 포스팅 되어서인지 세계 각국에서 접속 및 레시피 관련 문의가 많았다. 실제로 블로그를 통해 오프라인까지 그 연이 닿았던 적이 종종 있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분은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계 미국인. 한국어를 하지는 못하지만 뿌리를 찾고 있던 중 ‘엄마의 마음’이 담긴 블로그 게시글들을 보고 한국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인의 밥상에 당연하게 들어가는 김치와, 국적불문 모든 이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던 잡채, 양념불고기 등의 메뉴 위주로 새벽부터 분주히 반찬을 만들었다. 만남 당일,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대낮에 온가족이 함께 동행하여 간단한 티타임 뒤, 도시락을 전달하였다. 숙소로 돌아가 도시락을 먹어본 그 분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한국음식을 제대로 처음 먹어본다는 그 분은 “이 것이 한국의 맛이고, 말씀해주신 한국의 정(情)이군요. 정말 맛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하며 먹는 내내 만감이 교차하여 눈물과 함께 무거운 목 넘김을 이어갔다는 내용이었다. 아마도 글쓴이가 엄마의 한식 블로그를 시작한 이유를 들었던 그 날의 따듯하면서도 쓴 목넘김과 비슷한 맛이었으리라.

    제 4장: 세대를 아우르는 즐거운 그 맛
    글쓴이에게도 글쓴이를 ‘엄마’라 부르는 존재가 생겼다. 외국인 엄마에게 한식을 배워 아이의 식사를 준비한다. ‘제철 메뉴에는 무엇이 있다, 아프거나 기운이 없을 때는 어떤 재료를 사용해 어떤 음식을 먹이면 입맛 돋우는데 좋다’는 등 즐겁게 그 노하우를 전수받고 있는 중이다. 엄마만큼 솜씨가 있지는 않아 제대로 된 맛을 내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이가 그럭저럭 잘 먹어주니 그 또한 글쓴이 만의 한식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친정 가는 길에 “엄마, 오늘은 진짜 김치찌개만 있으면 돼.”라고 신신당부하는 내 문장에 “Then 김치찌개, 연근조림 and 시금치무침. Okay? Do you  want 배추김치 or 깍두기?”라고 말하는 우리 엄마는 외국인일까.

  • 장려상

    외국인 엄마의 Korean Food

    이우연

  • [백일장]

    뜨겁게 즐거운

    작품내용

    서른일곱이 된 화자는, 신문 기사에서 한국 길거리 음식들이 해외에 널리 알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화자는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추억과 회환, 후회와 그리움을 가득 담아 편지를 씁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퇴근길 마다 길거리에서 포장해 오셨던 야식들. 한식을 매개로 아버지와 소통하고 추억을 쌓아왔던 기억들과 그로 인해 삶을 배워왔던 화자가, 이제는 아버지가 되어, 자신의 아버지처럼 어른이 되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소울 푸드의 위로와 도움이 있을테니 두렵지 않습니다.

      아버지,


    이제 곧 저는 서른일곱 살이 됩니다. 제가 일곱이 되던 해, 아버지의 나이가 되는 것이지요. 오늘은 잘 읽지도 않던 신문을 봤습니다. 영국 런던에 있는 요리학교에서는 호떡과 막걸리를 이용한 디저트를 개발했다고 합니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한국 길거리 음식 페스티벌이 열렸다고 하고요. 떡볶이가 전 세계인의 소울 푸드가 되려는 기세입니다. 아버지와 제가 만들었던‘영양빵쩜 떡볶이’기억하시죠? 졸라대는 저를 위해 만들긴 해야겠고, 방법은 모르고, 넣을 것마저 없어서 떡과 고추장만 버무려 만들어 두고 저렇게 이름 붙이곤 껄껄 웃으셨지요. 그 맛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이렇게 맛있는 떡볶이는 전 세계로 수출해야 한다며 허풍 담아 하신 말씀을 생각해보면, 요즘 세계에서 한식, 그것도 스트리트 푸드의 위상에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일곱 살의 저는 저녁 무렵만 되어도 아버지를 기다렸습니다. 돌아보면 여섯 시, 돌아보면 일곱 시, 시간마다 뜨끈한 아랫목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는 시간은 뜨겁게 즐거웠습니다. 방바닥에 귀를 딱 붙이고 골목길 아버지 구둣발이 보도블록을 타박타박 밟는 소리를 옆집 개, 양순이보다 더 빨리 알아채고 문간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아버지가 어려워 다가오지도 않던 형과 누나와 다르게 저는 아버지가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면, 달려들어 배꼽에 양손을 얹고 “안녕히 다녀오셨습니까?”하고 고함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었죠. 그 나날 중 제가 한 번도 아버지와 눈을 먼저 마주치지는 않았었던 걸 기억하시죠? 네, 아버지께로 왈칵 달려가 가방에 찰싹 달라붙던 저는 사실, 아버지보다 그 가방에 더 관심이 많았었지요. 퇴근길마다 그 인조가죽 가방 안으로 쏙쏙 들어가 가방 모양대로 찌그러져 꺼내졌던 떡볶이, 순대, 군고구마, 붕어빵, 닭꼬치, 호두과자…. 온갖 뜨겁고 즐거운 것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신발을 벗고 외투를 정리해 걸기도 전에 달라붙은 성가신 다섯 살 아들부터 해치우고자 하셨던지 가방을 열어젖히셨죠. 막상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기다려온 음식이 꺼내어 지면 섭섭하다 싶을 정도로, 정말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갈 걸 알면서도 아버지는 가장 먼저 가방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호떡 봉지를 꺼내“옜다, 욘석아.”하고 안기셨었습니다. 그러면 저는 또, 크게 절을 하며“감사합니다”라던가, 엄지를 치켜올리며“아빠 짱”이라던가 하며 기쁨을 드렸어야 했을 텐데 아쉽게도 그때의 저는 너무 어리고 철이 없어, 개뼈다귀 앞에서 불러도 대답 없이 침만 질질 흘리는 옆집 개 양순이 마냥 뒤도 돌아보지 않고 쪼르르 야식만 안고 도망질쳤더랬습니다.

    그 까만 인조가죽 가방은 삼십 년도 견뎠었죠. 그곳에서 그날그날 예고 없이 꺼내어지던 다양한 음식을 아버지 기다리는 저녁 내내 상상하는 것이 저에겐 유년의 가장 행복했던 기억입니다.

    아버지는 기억하시나요?

    간단하게 손발을 씻고 수건을 목 뒤로 두른 채 방안으로 들어오셔서는 또 가방에서 소주 한 병 꺼내선, 양념 통닭 뜯는 우리를 보고 한잔하시고, 붕어빵 꼬리를 뜯어 먹는 형을, 머리부터 뜯어 먹던 누나를 번갈아 보고 한잔하시고, 또 단팥 가득한 붕어 배부터 한입 베어 먹는 저를 보고 웃으셨었지요.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그 순간이 고된 하루를 잊는 아버지만의 휴식의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하루의 가치를 곱씹을 수 있는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들이 저에게도 아버지에게도 뜨겁게 즐거웠던 기억이었을 겁니다.

    어디서 싸게 구했다하시며 임연수 다섯 마리를 가져오셨던 날, 우리는 마당에서 거뭇거뭇한 숯가루를 온 얼굴, 특히 입 주변에 검게 발라가며 뻐끔거리고 있었고, 아버지는 익는 대로 고깃살 발라 우리 입에 넣어주셨던 시간도 떠올려봅니다. 밥이야 우리가 떠서 먹어도 되었을 텐데, 그때는 그게 뭐가 그렇게 재미있었던지, 아버지는 우리 셋을 세워두고 번갈아 가면서 밥한 숟갈 고기 한 점 집게로 집어서 넣어주셨었습니다. 그날 마당 가득한 고소한 연기를 보며, 양순이 컹컹 짓는 부러움의 소리에 어깨도 으쓱 올라갔었습니다.

    그러던 저는 왜 그렇게 또 훌쩍 빨리 커버렸을까요? 열 살이 되고 열셋이 되고 중학생이 되면서 문간에서 두발 세 발 물러나, 더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일보다는 다른 것들에 온통 관심이 돌아갔습니다. 거울을 보며 턱에 삐져나온 턱수염 두 가닥을 만지는 일 같은 것이었죠. 형이나 누나는 공부로 더더욱 집과 멀어졌고요. 그 시절에도 아버지의 검은 서류 가방에서는 야식들이 어김없이 들어있었지만, 우리 중 누구도 야식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시절. 아버지는 멀게만 느껴졌고, 두렵고 다가가기 꺼려지는 어색하고 무거운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시절 퇴근한 아버지는 간단하게 손발을 씻고 마루에 앉아서 홀로 가방에서 떡볶이와 순대를 꺼내 술 한잔하시며 밤 시간을 달래였었죠. 그때 나는 왜 그 야식 상으로 다가가지 못했을까요.

    어머니가 오랜 항암치료로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셨던 날, 장례식장에서 저는 내가 딛고 있는 땅도 올려다보던 하늘도 다 무너져 내린 것 같았습니다. 견딜 수 없이 뜨거운 눈물이 가슴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내 몸이 누군가 맛보면 소태가 아닐까 싶을 만큼 눈물이 짜고도 짰었지요. 그때 아버지가 다가오셨죠.

    “밥은 먹고 울어라”

    육개장 한 그릇 제 앞으로 자꾸만 밀어놓으셨죠. 꺽꺽 눈물과 숨, 국물과 밥알이 한 번에 넘어가느라 몸이 펌프가 된 듯이 모든 걸 입 밖으로 뿜어냈습니다. 앞니로 숟가락을 꽉 잡아도 숨이 날아가 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때 아버지께선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한다며 등 두들겨가며 한입 한입 넣어주셨습니다. 아버지, 그때 아버진 그 육개장 드셨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아버지, 이제 곧 저는 서른일곱 살이 됩니다. 아버지와의 추억을 되새김질해 보면, 그 곁엔 항상 음식이 있었습니다. 요즘엔 한류와 한식의 세계화로 내 나라 우리 문화 내 음식이 자랑스러운 날들이 이어집니다. 외국인 동료들은 한식당을 추천해달라고 하고, 제대로 된 한정식을 알려달라고 성화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저에게 한식은 우리 삶 가장 가까이에서 일상과 추억을 채웠던, 아버지의 낡은 가방에 들어있었던 길거리 음식들이었습니다. 말주변이 없던 부자 사이에 연결고리가 되어주었던 우리의 소울 푸드들이 기억 속에 새처럼 하나하나 날아와 앉습니다. 아버지 손자 형호도 이제 다섯 살이 되었습니다. 길거리에서 붕어빵을 보면, 팔을 잡아당기는 힘이 제법 셉니다. 녀석과 나는 거리에서 아버지와 내가 그랬던 것처럼 또 서로를 연결 짓고 추억을 세워줄 음식들을 찾겠지요. 아버지와 제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아버지, 이제 저는 서른일곱 살도 되었고 하니, 밥 먹다 울지는 않겠습니다. 눈물 콧물 쏟지 않고, 가방 구석에 자리 하나 남겨두겠습니다. 아버지처럼 어느 힘겨운 날엔 떡볶이든, 만두든, 김밥이든 담아서 집으로 향하겠습니다. 그 하루의 의미를 뜨겁고 즐겁게 만들어줄 우리의 소울 푸드와 함께.  

  • 장려상

    뜨겁게 즐거운

    민예림

  • [백일장]

    오색빛깔 자연과 한식

    작품내용

    아이의 시선으로 본 한식은 단순히 먹는 즐거움이 아닌 눈으로 보고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대상입니다. 이는 오색 방석을 타고 노는 색동저고리를 입은 아이가 될 수도, 초록색 나무에서 빨간 새싹이 자라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연 속에서 재료를 얻어 만드는 건강한 한식인 만큼 시각적으로도, 미각적으로도, 영양성분적으로도 정말 훌륭한 음식임에 틀림없습니다. 조상의 지혜가 담긴 우리의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도 자연을 품는 것과 같은 풍요로움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아이와 어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1. 초록 우물 온천
    어머니!
    초록 우물 안 친구들이 수영을 하고 있어요. 따끈한 수증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니 저기가 바로 온천인가봐요. 아가야!
    신라시대 나라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해결한 만파식적이 무엇으로 만든 것인지 알고
    있니?
    사시사철 올곧고 푸르게 자라나는 대나무란다. 그래, 뒷산에 울창하게 솟아있는 그 대나무말이다. 잘 불려둔 멥쌀과 찹쌀을 준비해두었지. 소금물을 팔팔 끓여 대나무통에 잠시 부워 말끔하게 씻어주렴. 불려둔 쌀과 함께 완두콩, 밤, 은행 다양하게 채워준단다. 커다란 냄비 안 수증기로 가득찰 때 면포를 덮은 대나무통을 
    살포시 넣어준단다. 강력한 해독성분이 있어 음식 속의 독소를 중화시키는
    대나무의 향이 고스란히 담긴 대통밥이란다. 


    2. 색동저고리와 오색 방석
    어머니!
    팔각바위 위 색동저고리를 입은 아이들이 오색 방석을 타고 있어요. 노란색, 주황색, 연두색, 자주색 그리고 하얀색. 아이를 곱게 감싼 오색빛깔 방석이 너무 포근해 보여요!
    아가야!
    노란색은 치자, 주황색은 당근, 연두색은 시금치, 자주색은 비트, 하얀색은 본연의 밀. 색동저고리를 입은 저 아이들은 파프리카, 당근, 오이, 양파, 버섯. 우리의 식재료로 만들어낸 다양한 빛깔이란다. 참 아름답지?
    치자는 물에 담가 색이 우러나오게 해주고
    당근, 시금치, 비트는 곱게 갈아 밀가루에 넣어 색을 내 준단다. 각각의 색을 담은 밀전병은 숟가락을 눕혀 빙글빙글 동그랗게 만들어준단다. 다양한 채소는 젓가락처럼 얇고 길게 썰어주렴.
    노란 겨자소스도 함께 놓아주거라. 팔각바위 위 오색 방석을 타고 있는 색동저고리를 입은 아이들은 바로
    구절판찬합에 담아 먹는 우리나라 고유의 음식인 구절판이란다.


    3. 초록 나무 빨간 새싹
    어머니!
    여긴 울창한 초록 숲, 초록색 나무 마을인가봐요. 초록색 나무에서 빨간 새싹이 자라나고 있어요!
    아가야!
    지난 여름 텃밭에 핀 샛노란 꽃을 본적이 있니?
    그 꽃이 피고난 자리에 자라난 아이가 바로 이 오이란다. 참 멋지지?
    소금으로 오이를 깨끗하게 씻겨준단다. 길다란 오이가 몽땅 나무가 될 수 있게 이쁘게 잘라주렴. 가지를 뻗을 수 있게 십자 모양으로 아프지 않게 칼집을 내주었단다. 오이의 갈라진 틈 안을 다양한 양념으로 가득 채워준단다. 새싹이 자라고 있는 초록색 나무가 바로
    봄부터 여름에 걸쳐 먹는 별미 김치인 오이소박이란다. 


    4. 노란 들판
    어머니!
    여기 들판을 좀 보세요. 노랗게 물든 노란 꽃들로 들판이 가득찼어요. 아가야!
    아침 일찍 광주리에 담아온 달걀들을 보았니?
    건강한 곡식을 먹고 자라서 달걀 노른자도 정말 샛노랗단다. 색이 참 곱지?
    달걀물에 흠뻑 몸을 담근 동태, 새송이, 두부가 보이니?
    하얗던 아이들이 금새 노랗게 물들었단다. 기름을 살짝 두른 팬에 달걀물을 입은 아이들을 천천히 놓아주렴. 고소한 냄새가 풍기면서 조금 더 단단한 아이들이 될 거란다. 노랗게 물든 노란 꽃들이 바로
    따끈하게 먹을 수 있는 동태전, 새송이전, 두부전이란다.


    5. 능소화
    어머니!
    이 아름다운 꽃은 어디서 피어난 것일까요?
    주황빛 능소화와 같이 빨간 얼굴을 보여주고 있어요!
    아가야!
    호랑이가 가장 무서워하던 게 무엇인 줄 알고 있니?
    가을바람 쐬고 정성스레 말려놓은 지붕에 매달린 저 곶감이란다. 하얗게 건조된 쭈글쭈글한 곶감의 내면을 보렴. 참 촉촉하지?
    곶감의 꼭지를 잘라내 반을 잘라준단다. 촉촉한 과육 안에 꼭꼭 숨어있는 씨는 조심스레 발라주려무나. 기름 없는 팬에 살짝 볶은 호두를 차례로 넣어주렴. 그리고는 포근히 곶감으로 호두를 말아주는거야. 주황빛 능소화같은 이 꽃이 바로
    호두를 넣어 만든 말아 만든 곶감말이란다. 아가야!
    알록달록 자연에서 태어난 것들로 만든 음식을 꼭 꼭 씹어먹으면
    내 품 안으로 다시 자연이 들어온단다. 그게 바로 우리나라 고유의 한식이란다.   

  • 장려상

    오색빛깔
    자연과 한식

    문송이

  • [백일장]

    뽀글뽀글

    작품내용

    스페인 그란 카나리아(Gran Canaria)섬. 그때까지 내가 봤던 지도에도
    나오지 않았던 이곳까지 어떻게 300가구나 되는 한국 사람들이 모여 살았을까?
    1960년대 대한민국 정부가 외화벌이 목적으로 원양어업 기지를 이곳에 두었기에
    한국 선원 아저씨들만 해도 8천 명이 웃돌았던 곳이다. 그러기에 한국 음식을 빼놓고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곳이기도 하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이민이 아니고 취업으로 들어왔고 옹기종기 모여 300가구나 되는 한인사회가 형성되었고 이들 중에 한 가족으로 우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춧가루가 없어서 밀가루처럼 고운 스페인 파프리카 파우더에다 파프리카를 갈아 넣고 김치를 담아 먹었던 그 시절이 어찌 보면 모든 엄마를 특별한 요리사로 만들지 않았을까?거의 공짜로 주다시피 했던 소 내장과 소뼈 소꼬리들을 얻기도 하고 사기도 하여 소꼬리 곰탕을 맛있게 끓어 내던 엄마들의 지혜와 특별한 요리가 우리 가족이 삼대째 소꼬리 곰탕이 뽀글뽀글 국이 되어 지금도 맛있게 끓여내고 있다.

    1970년을 뒤로하고 80년도 초에
    그 당시에는 내가 한국에서 본 세계 지도에도 없던 곳
    스페인 그란 카나리아(Gran Canaria) 섬으로 2년 8개월 된 딸을 데리고 남편 따라서 갔다.
    멀기는 또 얼마나 멀었던가?
    그 시절에는 대한항공이 스페인 진출을 하기 전이였고, 
    아직 소련이 서쪽 하늘을 가로막고 있었기에 
    장장 비행기를 4번을 갈아타야만 했고 
    알래스카를 경유하여 30시간이나 걸려서 
    그 머나먼 스페인 그란 카나리아 섬까지 갔었다.
    내 나이 26세에. . .


    지도에도 나오지 않았던 이곳까지 
    어떻게 삼백 가구나 되는 한국 사람들이 모여 살았을까?
    1960년대 대한민국 정부가 외화벌이 목적으로 원양어업 기지를 이곳에 두었기에
    한국 선원들만 해도 8천 명이 웃돌았던 곳이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이민이 아니고 취업으로 들어왔고 
    옹기종기 모여 삼백 가구나 되는 한인사회가 형성되었고 
    이들 중에 한 가족으로 우리도 포함이 되어있었다.


    그러다 보니 엄마들까지 고생하지 않아도 되었고 거의 모든 엄마는 주부로
    자녀교육과 식탁에만 신경을 쓰면서 편안한 해외 이민 생활을 하는 곳이기도 했다.
    모든 한인 아빠들은 수산업에 종사하였기에 입항한 선원 아저씨들을 
    점심 아니면 저녁 식사에 거의 매일 가가호호 집마다 서너 명씩 모시고 오셨고
    엄마들은 있는 것 없는 것 다 꺼내서 푸짐한 한식을 만들어서 대접해 드리곤 했다.
    그러기에 한식을 빼놓고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곳이기도 하다.


    초창기 시절에는 한국 슈퍼도 없었기에 한식 재료는 모두 귀했다.
    여기에 얽힌 재미나는 사연도 많았고 추억도 많다.
    어떤 분께서는 두부가 너무나 먹고 싶어서 슈퍼를 갔더니 두부가 있어서
    “우와!” 얼른 한 덩어리 사다 된장을 넣고 두붓국을 끓었더니 
    두부는 간데없고 국물만 있더라고…
    알고 보니 두부가 아니고 꼭 두부같이 생긴 말랑말랑한 치즈였다고 한다.
    코끝이 찡~하면서 웃음이 나오는 이야기다.


    고춧가루가 없어서 밀가루처럼 고운 스페인 파프리카 파우더에다 
    파프리카를 갈아 넣고 김치를 담아 먹었던 그 시절이 
    어찌 보면 모든 엄마를 특별한 요리사로 만들지 않았을까?
    나도 먼저 오신 선배분들에게 배워가면서 열심히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 선배 아주머님께서 맛있는 것을 주겠다고 날 부르신다.
    그 집에 갔더니 커다란 들통에다 뭘 푹푹 끓이고 있는데 나이 어린 내가 볼 때는 
    그 들통 크기가 가마솥같이 크게 보였고 저 큰 솥에 뭘 끓일까?
    궁금하기까지 했다.


    “맛있게 잘 끓어졌네”
    “이게 말이야 곰탕이야!”
    그러시면서 한 냄비 퍼 주며 저녁에 먹으라고 한다.
    “여기는 까르니세리아(정육점)에 가면 뼈도 공짜로 주고 
    소꼬리도 거의 공짜로 주고, 속 내장은 돈 조금만 주면 다 살 수 있어.”
    “그래서 자주 이렇게 큰 들통에다 끓어서 먹는데 정말 맛있고 좋아.”
    “아기 엄마도 끓어서 먹어봐 진짜 맛있어.”


    나는 그 뒷날 바로 까르니세리아로 달려갔다.
    정말로 소뼈도 소 다리도 심지어 돼지머리까지도 맘대로 가져가라고 한다.
    지금은 이 모든 것들을 돈을 받고 팔지만, 그 시절에는 다 공짜로 줬다.
    이곳 카나리아도 슈퍼가 있고 한국 재래시장처럼 시장이 있다.
    시장에 있는 정육점에서 모든 뼈를 공짜로 줬다.
    얻어온 소뼈들을 깨끗이 씻어 이웃 아주머니께서 가르쳐 주시는 대로 푹푹 끓이기 시작했다.
    무도 듬뿍듬뿍 썰어서 깍두기도 담아서 곰탕에 곁들여 먹으니 맛이 더 좋았다.


    어느덧 한인 생활도 5년째 접어들었고 그사이에 둘째, 아들도 태어났다.
    나만의 노하우도 생겼고 나만의 곰탕 끓이는 방식도 생겨났다.


    이것저것 마구 넣고 끓이던 곰탕이 깔끔하면서도 맛있는 소꼬리 탕으로 탈바꿈을 했다.
    아이가 둘이 되었기에 주로 아이들 먹기 좋은 쪽으로 바뀐 것이다.
    고기만 끓여서 먹이는 것보다는 야채도 듬뿍 넣고 끓이는 방식으로 선택을 했다.


    “아, 그래 맞다! 바로 그거야!”
    소꼬리 곰탕을 푹! 끓여서 고기는 발라 소금, 후추, 참기름, 마늘을 넣고 따로 무
    쳐 놓고 육수는 냉장고에 넣고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면 기름이 위에 하얗게
    굳어 있는 것을 걷어 내면 뽀얀 묵처럼 탱글탱글 한 육수만 남는다.
    여기다 빨간 파프리카를 듬뿍듬뿍 썰어 넣고 대파도 듬뿍듬뿍 썰어 넣고 
    푹~끓여서 마지막에 양념해 두었던 소꼬리 고기를 넣고 오직 소금과 후추에 
    간을 하고 한소끔 끓어 놓으니 그 맛은 환상이다.
    소꼬리만 달랑 끓이는 것보다 맛도 색깔도 너무나 이쁘고 맛있었다.
    밥 한 그릇 말아 주면 두 아이는 사발을 들고 마시고 그릇을 비워냈다.
    그렇게 자주자주 소꼬리 곰탕을 끓이고 또 끓이고 또 끓었다.


    하루는 4살 먹은 아들이 “엄마 뽀글뽀글 에다 밥 말아 줘!”
    “엥? 뽀글뽀글?”
    “그게 뭔데?”
    “뽀글뽀글 엄마! 뽀글뽀글!”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깍두기를 가리키면서
    “꽈드라도(스페인어 네모) 김치에다 먹는 뽀글뽀글!”
    아!!
    커다란 들통에다 푹푹 보글보글 끓이는 소꼬리 곰탕이 4살 먹은 어린 아들의 
    눈에는 그게 뽀글뽀글 끓이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 집 소꼬리 곰탕의 이름은 뽀글뽀글 이가 되었고 
    깍두기는 꽈드라도 김치가 되었다.


    세월이 흘렀다.
    4살 먹었던 아들은 커서 장가를 갔고 두 손주는 싱가포르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큰 손주가 5살이고 작은 손녀가 2살 먹었을 때 아들이 영국으로 연수를 오면서 
    가족이 영국에서 1년간 살게 되는 기회가 있었다.
    그때 영국에서 처음으로 소꼬리 곰탕을 끓여줬다.
    물론 이름은 “뽀글뽀글” 국이다.
    손주 손녀는 그 맛에 한마디로 뽕 갔다.
    4살 먹었던 내 아들이 날마다 뽀글뽀글 노래를 부르더니
    이제는 손주가 날마다 뽀글뽀글 노래를 부른다.
    이 세상에서 젤 맛있는 음식이 할머니가 끓여 주는 뽀글뽀글 국이란다.


    영국에 살 때 5살이던 손주는 지금 싱가포르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고
    공부 시간에 학교 선생님께서 자기가 젤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냐 했을 때
    손주는 “뽀글뽀글 국이요!”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던 선생님은 부모에게 연락이 왔고
    도대체 뽀글뽀글 국이 뭐냐고?
    아들이 소꼬리 곰탕이라고 설명을 해 주므로 일단락이 되었던 일도 있었다.
    손주는 그만큼 자기의 넘버 원 음식이 뽀글뽀글 국이란다.



    얼마 전에는 화상 통화를 하면서 택배를 보낼 건데 먹고 싶은 것 있으면 말해라
    ~ 했더니, 큰 손주는 “뽀글뽀글!” 작은 손녀는 “백김치!” 하하하~~~


    스페인에서부터 끓이기 시작한 소꼬리 곰탕이 3대째 즐겨 먹는 뽀글뽀글 국이
    되었고 지금도 나는 그때 그 방식대로 뽀글뽀글 국을 맛있게 끓여낸다.


    코로나로 19로 인하여 항공 길이 막혀 2년 동안 만나보지 못했던 
    싱가포르 손주들을 이제 12월에 만나게 되었으니 
    세계에서 젤 맛있는 한우 소꼬리에다 
    한국에서 재배하는 파프리카와 한국 대파를 한 움큼 넣고 
    뽀글뽀글 국을 푹푹 끓여 가져가야겠다.

  • 장려상

    뽀글뽀글

    김연순

  • [백일장]

    겨울, 김치찌개를 먹다

    작품내용

    지은은 엄마를 먼저 보내고 아빠와 단 둘이 남았지만, 아빠와도 서먹해진지 오래다. 차가운 바람이 매섭게 부는 추운 겨울, 지은은 다른 사람들 집을 청소하며 밥 한 끼 챙겨먹기 힘들다. 어느 날 오픈도 하기 전인 한 식당에서 김치찌개를 먹게 되고, 육체적 노동으로 지친 몸을 한식으로 따뜻하게 녹이게 된다. 지은은 식당 주인인 그녀와 만나면서 한식에 대해 새롭게 알아가고 음식의 따뜻함에 깊은 위로를 받는다.

     입을 살짝 벌리면 하얀 입김이 얼굴에 피어올랐다. 아직 오후 6시밖에 안 됐는데 하늘은 이미 어두워졌고, 덕분에 도로의 자동차 헤드라이트와 건물의 조명은 더욱 환히 빛났다. 이제 정말 겨울이었다. 덕분에 두 발은 감각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은 얼굴에 닿아 따가웠다. 차가운 바람이 몸과 얼굴을 천천히 마비시켰지만 옷과 몸에 깊숙이 찌든 땀 냄새는 지우지 못했다. 이른 새벽부터 이집 저집 청소한 육체적 노동의 대가는 14만원. 14만원어치의 냄새였다. 그때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렸다.

    ‘오늘도 늦니? 저녁 같이 먹을까 해서.’

     예상했지만 아빠가 보낸 문자였다. ‘하-’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얗게 입김이 피어오르더니 금방 공기 속에 사라졌다. 눈으로 젖은 신발 때문에 양말은 점점 축축해져갔고, 나는 이상하게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어졌다. 생각해보니 오늘 점심도 편의점 빵으로 대충 때우고 제대로 먹은 게 없었다. 먹은 게 없다고 생각하니 금방 배가 고파졌고 텅 빈 배를 따뜻한 국물로 채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거리는 대체로 피자, 치킨, 고기집 같은 식당이 즐비했고, 혼자 들어가 먹기도 어색했지만 별로 입맛이 당기지 않았다. 괜스레 몸에 힘이 빠지고 편의점에 가서 라면이나 먹을까 하던 찰나 바로 옆에서 따뜻한 연기가 느껴졌다. 연기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주방만 켜진 작은 식당 안에서 요리를 하는 한 여성이 보였다. 나는 순간 머리로 생각도 하기 전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말했다.

     “저 혹시 저녁 먹을 수 있을까요?”

     식당 주인으로 보이는 여성은 내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듯 짧은 비명을 질렀다. 그제야 나도 내가 이 식당 안에 들어왔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아... 혹시 밥 먹을 수 있나 해서요.. 식당 문 연 건가요?”   “어떡하죠? 죄송해요. 사실 아직 오픈 전이라.. 식당은 내일모레부터 문 열어요.”  “불도 꺼져 있었는데 따뜻한 냄새가 나서 저도 모르게.. 다음에 다시 올게요. 죄송해요.”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얼었는데 얼굴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마 만지면 볼에서 잔뜩 열을 뿜을 것이다. 괜히 민망해져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그럼 괜찮으시면, 김치찌개 조금 남은 게 있는데 드실래요?”

     내가 앉아있는 테이블 쪽으로 그녀가 찌개와 밥을 들고 다가왔다. 그리고 내 앞에 그릇을 내려놓았다. 찌개와 밥을 가득 담은 그릇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왔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그녀는 내게 맛있게 먹으라는 말 한마디 건네고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와. 김치찌개가 이렇게 맛있는 냄새였나. 내가 생전에 본 김치찌개와는 색깔도 냄새도 완전히 달랐다. 찌개는 돼지고기와 김치가 한데 어우러져 고운 색을 풍기고 있었다. 나는 살짝 떨리는 손으로 숟가락을 잡고 김치찌개를 먼저 한 입을 떠먹었다. 따뜻한 국물이 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맛있었다. 

     “맛있다...”

     아. 나도 모르게 속마음을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아직 몸은 차가웠지만 순식간에 따뜻하게 녹아내리는 게 느껴졌다. 배가 차니 긴장했던 마음이 풀리고, 나는 허겁지겁 밥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밥 먹기 시작한지 몇 분 되지 않아 쌀 한 톨 남기지 않고 먹어치웠다. 그녀는 괜찮다며 돈도 받지 않았고 나는 그렇게 식당에서 나왔다. 입안엔 아직 김치찌개의 짭짤함이 남아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어느덧 밤 10시가 다 되어갔다. 집안에 들어서니 주방 불만 켜진 채 사람 사는 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고요하고 조용했다. 안방 문을 살짝 여니 아빠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침대 한편에 누워 불편한 자세로 잠을 자고 있었다. 방은 좁았고, 침대는 좁은 방의 면적을 거의 다 차지할 만큼 컸다. 그리고 침대는 아빠 혼자 쓰기에 빈자리가 너무 컸다. 빈자리만큼 아빠의 모습은 외롭고 쓸쓸해보였다. 주방으로 가니 식탁에 아빠가 차려놓은 밥이 차게 식어있었다. 계란프라이와 참치캔, 김치 정도가 다인 조촐한 밥상이었다. 나는 냄새조차 식은 밥상을 보며 입안에 살짝 남아있는 김치찌개의 맛을 다졌다.

      아침부터 왜 이곳에 왔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집에서부터 걸어서 30분은 걸리는 거리. 오후에는 일도 하러 가야 되는데. 단지 밤새 그곳에서 먹었던 김치찌개가 생각나서였을까, 아니면 그곳의 따뜻한 온기를 다시 느끼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이유도 모른 채 나는 아침 9시 그 식당 앞에 도착했다. 어제는 어두워서 보지 못했던 ‘아카사니’라 쓰여 있는 간판. 그리고 문에는 ‘오픈 준비’라고 써진 종이가 붙어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주방에서 식재료를 정리하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그녀의 모습을 보자 어제 얻어먹었던 식사에 대한 답례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종소리가 ‘딸랑’ 울리고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저 어제 제가 갑작스럽게 들어와서 식사하고, 얻어먹기까지 해서... 아직 주방 정리하시는 거 같은데 제가 도와드리고 싶어서요. 어제 식사 답례로.”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어제 맛있게 드신 것만으로 저는 감사한데요. 괜찮아요. 그리고 제가 드리고 싶어서 대접한 거예요.”  “제가 하는 일이 주방 청소하는 거예요. 괜찮으시다면 꼭 도와드리고 싶어요.”

     그녀는 당황한 듯한 내색을 숨기지 못했지만 나의 확고한 부탁에 주방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다. 냉장고 안에 식재료를 정리하고 있는 중인 듯 보였다. 주방을 살짝 둘러보니 고기, 생선, 채소, 각종 재료들과 반찬들이 한구석에 쌓여있었다. 그리고 냉장고 안에는 김치부터 장아찌, 나물무침, 양념들이 들어있었다. 나는 그녀를 도와 식재료를 정리를 도왔다. 한눈에 봐도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어색한 기류도 깰 겸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이거 다 직접 만드시는 거예요? 혼자 하려면 너무 손이 많이 갈 거 같은데...”
       그녀는 내 말에 웃음을 짓더니 주방 뒷문을 열고 내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작은 마당이 펼쳐졌는데 그곳에는 10개 정도 되어 보이는 장독대들이 줄지어 나열돼 있었다. 그녀는 내게 장독대 몇 개의 뚜껑들을 열어 고추장, 된장, 간장 같은 각종 장들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한 장독대를 여니 꽤 숙성돼 감칠맛 도는 빛깔의 김치가 들어있었다. 그녀는 이파리 한 쪽을 떼어내 내게 먹어보라며 건넸다. 그 김치를 입에 넣는 순간 어제 먹었던 김치찌개의 맛이 입안에 강하게 느껴졌다.

     “어제 김치찌개에 넣었던 김치예요. 사실 지은씨 말처럼 한식을 만든다는 건 손도 많이 가고 굉장한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일인 거 같아요. 근데 저는 그 과정이 한식을 더욱 맛있게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재료를 준비하고 손질하는 과정부터 그 음식을 먹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 김치만 생각해봐도 김치를 만들기 위해 배추를 손질하고, 소금에 절이고, 버무려야 하죠. 그리고 오랜 시간을 기다리면 그 김치는 맛좋은 빛깔을 내며 어떤 음식에도 잘 어울리는 좋은 식재료가 되죠. 김치뿐만 아니라 모든 한식이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한식을 보 고 먹는 것만으로도 우리 모두가 즐거운 게 아닐까요. 지은씨가 어제 김치찌개를 맛있게 먹어준 것도 다 그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해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빛나서 나는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저 햇살에 비춰 빛이 났던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겨울바람에 차가워진 몸이 그녀의 옆에서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점심 드시고 가실래요? 일도 도와주셔서 덕분에 빨리 끝났는데 한 끼 대접하고 싶어서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먹고 싶은 음식이 있냐는 질문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김치찌개요’라고 답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다른 집들을 청소하며 냉장고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예전엔 그냥 빨리 청소를 마치고 돈을 버는 것에 급급했는데, 언제부턴가 다른 집들 냉장고엔 무엇이 들어있을까, 하는 생각에 빠져 청소는 뒷전이 되어버렸다. 내가 청소를 하는 대부분의 집 냉장고는 겉으론 비슷비슷했지만 속은 완전히 달랐다. 인스턴트, 냉동음식으로 꽉 찬 집이 있는가 하면, 스파게티, 빵과 같은 밀가루 재료들로 가득한 집, 편의점 도시락과 삼각김밥으로 채워진 집. 냉장고 속을 보면 그 집의 주인이 어떻게 사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 날 갑자기 궁금해졌다. 우리 집 냉장고는 어떻게 생겼지? 그 속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었지?

     그날 나는 늦은 밤, 일을 마치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다른 날과 다름없이 주방 불은 켜져 있었고 아빠는 방에서 새우잠을 청하고 있었다. 식탁에 차려진 딱딱하게 굳은 밥을 뒤로 하고 나는 냉장고 앞에 다가섰다. 냉장고는 167cm인 내 키보다 작은 크기에 위아래로 냉동실과 냉장실 손잡이가 있었다. 나는 오래된 세월을 증명하는 낡고 녹슨 손잡이를 잡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조금은 예상했지만 역시나 손으로 하나하나 확인할 것도 없이 눈으로 한 번 훑으면 냉장고 안에 있는 몇 개 안 되는 재료를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냉동실엔 냉동만두, 인스턴트 찌개 정도가 있었고, 냉장실엔 김치, 계란, 물 그리고 각종 술들이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그럴 듯한 반찬인 김치는 이미 너무 오래돼 폭삭 쉬어버렸다. 그렇게 쉬어버린 김치가 엄마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그 냉장고 속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내가 청소했던 수많은 집들의 냉장고들이 떠올랐고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따뜻한 김치찌개의 맛이 그리웠다.

      마지막 집을 청소하고 나니 시계는 밤 11시를 향하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나니 배속은 허기지다 못해 배고픔이라는 감각 자체가 무뎌진 느낌이었다. 김치찌개의 따뜻함이, 끓는 소리가, 그 냄새가 온몸의 감각을 자극했다. 식당이 이 근처인데 한 번 가볼까. 아직 문을 열었을까. 안 간지 조금 된 거 같은데... 라는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나는 식당 앞에 도착해 있었고 식당 안에 불은 꺼져 있었지만 주방에서 뒷정리를 하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유리창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가 나를 발견하고는 들어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나는 그 손짓에 이끌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반가운 듯 내게 말했다.

     “오늘은 일이 늦게 끝났나 보네요. 저도 바빠서 아직 저녁을 못 먹었는데 저녁 안 드셨으면 같이 김치찌개 드실래요? 지금 남은 게 김치찌개밖에 없어서.”  “좋아요. 김치찌개.”

     그녀는 밥과 찌개를 식탁에 내려놓고 내 맞은편에 앉았다. 아직 녹지 않은 추위 때문인지 고요한 정적 때문인지 살짝 떨리는 손을 붙잡고 숟가락으로 찌개를 퍼먹었다. 한 입 먹으니 금방 얼었던 몸이 풀어지고 속이 따뜻하게 물들어갔다. 그녀도 배가 고팠는지 아무 말 없이 밥을 먹었다. 위로 높게 묶은 머리가 길게 헝클어지고, 하늘색 셔츠 소매는 어떤 양념에 의해인지 더럽혀지고 물에 젖어 있었다.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데, 어쩌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머쓱해 웃다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 사람 많았어요? 장사가 잘 되나 봐요.”  “네. 다행이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주세요. 그래서 지금 제 상태가 엉망이에요.”  “한 번 먹으면 계속 생각나는 맛이에요. 음식에 그렇게 많은 정성과 시간을 쏟는데...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어요. 저도 사실 하루 종일 남의 집 청소하고 집에 갈 때 되면 상태가 엉망이에요. 옷에도, 몸에도 잔뜩 땀 냄새가 배어서 겨울바람이 이렇게 찬 데도 지워지질 않아요.”  “열심히 청소했다는 훈장 같은 거죠. 어떻게 보면 지은씨가 하는 일과 제가 하는 일이 많이 닮아있는 거 같아요. 시간과 정성을 쏟을수록 결과물은 행복을 불러오는 거죠.”  “그러네요. 그렇겐 생각 안 해봤는데... 근데 전부터 궁금했는데 왜 가게 이름이 ‘아카사니’에요?”  “아, 그게 아카사니가 조금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릴 때 내는 소리라는 뜻을 가진 순우리말이에요. 요즘 세상이 그런 거 같아요. 살기 바빠서 그런 소리를 내기조차 힘든 세상. 이곳에 와서 무거운 짐 잠깐 내려놓고 따뜻한 밥 한 끼 드시고 가셨으면 했어요. 지은씨가 처음 저희 가게에 들어온 날, 제가 왜 저녁 드시고 가라고 한 건 줄 알아요? 따뜻한 냄새라고 해서요. 원래 보통은 맛있는 냄새, 좋은 냄새라 표현하는데... 따뜻한 냄새라고 한 게 왠지 따뜻한 한 끼가 그리워 보였어요.”

     그 말을 듣는데 나는 왜 갑자기 엄마가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따뜻해서, 아니면 그녀의 진심이 느껴져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엄마에 대한 얘기를 그녀에게 하고 싶어졌다.

     “저희 엄마는 요리를 잘 못하셨어요. 맛있는 음식을 먹었던 기억도 딱히 없고, 소풍 갈 때면 다른 친구들은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왔는데, 저는 천 원짜리 하는 김밥 한 줄 사갔어요. 음...거의 매일 김치찌개만 먹었어요. 김치는 웬만해선 떨어질 일이 없었고, 금방 끓이니까. 하루는 두부 넣은 김치찌개, 다른 하루는 참치 넣은 김치찌개. 뭘 넣는지만 달랐지. 김치찌개란 건 똑같았죠. 생일 때도 엄마는 미역국 대신 김치찌개를 끓여줬어요. 대신 다른 때는 먹지 못하는 고기를 넣어서. 근데 저는 좋아했어요. 김치찌개는 정말 지겨웠지만 김치찌개 한 그릇을 중앙에 놓고 엄마와 아빠와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시간은 정말 즐거웠거든요. 그 시간을 정말 좋아했어요. 행복했던 거 같아요.  “저도 한 번 지은씨 어머니가 끓이신 김치찌개 먹어보고 싶네요.”  “저도요. 정말 질리도록 먹어서 입에 대기도 싫었는데.,, 엄마가 6개월 전에 돌아가셨는데 김치찌개가 제일 생각날지는 몰랐어요. 냉장고엔 아직도 엄마가 만든 김치가 남아있어요. 이미 폭삭 쉬어서 먹기조차 힘든데 아빠는 계속 그걸 먹으면서 엄마를 생각해요. 저는 그런 아빠를 계속 피하기만 하고.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안 괜찮은 거였어요. 여기서 김치찌개를 먹고서 알았어요. 엄마가 그리웠던 거였어요. 그 김치찌개와 함께 한 시간이 그리웠던 거였어요.”

      나와 그녀는 마저 남은 밥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꼭꼭 씹어서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는 똑같이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식당을 나왔다. 그때 문을 열고 그녀가 나오더니 내게 봉지 하나를 내밀었다. 그녀는 봉지만 주고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덩그러니 서서 검은 봉지를 열어보았다. 김치 냄새가 훅 코끝을 찔렀다. 오랜만에 배가 불러서, 그녀와 나눈 얘기가 귀에 자꾸 맴돌아서, 마음이 너무 따뜻해서, 엄마가 그리워서, 나는 그날 집으로 가는 길이 춥지 않았다.

      오늘은 며칠 만에 일이 없는 날이었다. 창 너머로 불 꺼진 집안에 붉은 햇살이 슬며시 들어왔다. 몇 시일까. 잠에서 깨 몽롱한 정신, 몇 시인지 모를 햇살. 오랜만에 옛 생각이 났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붉은 햇살이 어린 나를 덮쳤고 주방에선 칼질 소리, 찌개가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났다. 김치찌개의 매콤짭짤한 냄새는 나를 일어나도록 내 후각을 간지럽게 자극했다. 나는 엄마에게 다가가 잠투정을 부렸고, 그런 내게 엄마는 김치찌개를 후후 불어 한 입 먹여주었다. 그리고 아빠가 퇴근하면 우린 식탁에 둘러앉아 따뜻한 찌개를 품은 식사를 했다. 

      나는 주방에 가 냉장고를 열어 그녀가 준 김치를 꺼냈다. 냄비는 어디 있더라. 이 주방에 서 있는 것이 왜 이렇게 어색한 건지. 역시 그냥 하지 말까 생각하는데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한식을 만든다는 건 손도 많이 가고 굉장한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일인 거 같아요. 근데 저는 그 과정이 한식을 더욱 맛있게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재료를 준비하고 손질하는 과정부터 그 음식을 먹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 그래서 한식을 보고 먹는 것만으로도 우리 모두가 즐거운 게 아닐까요.’

      나는 냄비에 물을 올리고 어색한 손놀림으로 김치찌개를 만들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붉은 햇살은 사라지고 어둑한 하늘이 세상을 덮쳤다. 그때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집안으로 들어온 아빠와 딱 눈이 마주쳤다. 나는 한껏 어색한 자세로 아빠에게 인사를 했다. 

     “...다녀오셨어요? 아직 식사 안 하셨죠?”  “아아... 그래그래. 옷만 갈아입고 오마.”
       나는 김치찌개만큼이나 내 얼굴이 빨개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빠는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주방으로 와 식탁을 닦고 수저를 준비했다. 나는 찌개와 밥을 놓고 자리에 앉았다. 어색한 공기가 우리 둘 주위를 감싸 안았다. 잠깐의 긴 침묵을 깨고 말을 꺼낸 건 아빠였다.

     “김치찌개네. 오랜만에 먹네.”  “맛있을지 모르겠어요. 처음 해보는 거라... 맛있게 드세요.”
       아빠는 김치찌개를 한입 크게 떠먹었고 나는 아빠의 반응을 살폈다. 아빠는 한 입 꿀꺽 삼키더니 웃음을 지으며 밥을 국에 말았다.

     “김치가 맛있네. 따뜻하구나.”  “김치는 아는 사람이 줬어요... 곧 엄마 생일이네요.”  “그러게. 매번 한겨울이면 네 엄마 생일이 다가오는 걸 알았지.”  “우리 그때 엄마한테 김치찌개 끓여드릴까요? 고기 넣어서?”

     아빠는 내 말에 환히 웃으며 그러자고 말했다. 나는 애써 아빠 눈에 머금은 눈물을 모른 척 꾸역꾸역 밥을 넘겼다. 나는 그날 엄마와의 추억을 아빠와 함께 나눴다. 지금까지 참아왔던 그리움을, 투정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아빠에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김치찌개는 오래도록 따뜻했다.

  • 장려상

    겨울,
    김치찌개를 먹다

    권다영

  • 2021 제2회 한식 콘텐츠 스토리텔링 공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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