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장]
희로애락
(喜怒哀樂)
과의 동행, 한식
작품내용
희로애락의 순간에 즐기기 좋은 한식과 사유를 서술함 (희 : 잡채, 로 : 떡볶이, 애 : 육개장, 락 : 쌈, 그리고 대미의 장식 밥)
사람들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유사하게 연상되는 음식들이 있을텐데, 한식에 대해 널리 알리고 즐길 수 있게 하는 스토리텔링 콘텐츠로 확대하여 활용하기 좋을 것으로 예상함 (예 : 기쁠 때, 화날 때, 슬플 때, 즐거울 때 나만의 한식 메뉴 이야기)
“나는 먹기 위해 사는 걸까? 살기 위해 먹는 걸까?”
이 세상에 눈, 코, 입을 호강시키는 음식이 너무나도 많기에 이번엔 어떤 맛을 즐겨야 할지 고민하는 순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입맛은 떨어졌지만 기운을 내기 위해 뭐라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이런 자문을 하곤 한다.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이런 우스갯소리 같은 고민을 하는 이유는 식욕은 우리 인간의 3대 기본 욕구 중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무언가를 먹는다는 것은 단지 지금 이 순간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음식을 먹으면 각종 영양분이 신체에 흡수되어 하루하루 생활할 수 있는 에너지도 얻고, 건강을 유지하는 기틀이 잡히기도 한다. 이에 더해 음식에 담긴 의미와 맛에서 마음의 위안과 기운을 받기도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에서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다양한 감정에 빠진 상태에서 음식을 접하게 된다. 음식은 마술처럼 그 감정을 증폭하기도 하고, 다른 방향으로 전환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신비로운 경험은 개인의 인생사에 오랜 시간 여운으로 남기도 해서 특별했던 감정을 되살리기 위해 그 음식을 다시 찾는 경우도 있다. 마치 산부가 입덧으로 음식을 먹기 힘든 날에도, 꼭 특정 식당의 특정 메뉴의 음식이 생각나서 찾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한민족의 역사를 돌아보면, 한(恨)의 민족이면서도 이를 신바람 나는 분위기로 승화시켰다. 최근엔 문화·예술·정치·의료 등 사회 각 분야에서 한류(韓流)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데, 여기에 오기까지 반만년 역사 동안 숱한 외침과 재해를 이겨낸 원동력으로 한국인의 힘, 한식 밥상을 꼽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의의 희로애락(喜怒哀樂) 순간과 함께 했던 한식들은 저마다 사연이 있겠지만, 나 개인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여러 한식이 나에게 힘을 주었던 것처럼 다른 분들도 한식을 통해 즐거워지고, 미래로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희(喜) : 기쁜 일이 있을 땐 더욱 기분 좋게 하는 음식, 잡채
어렸을 적 명절에 친척집에 가거나 결혼식 같은 잔치 자리에 가면 평소에 못 먹던 특식을 먹을 수 있기에 마음이 들뜨고 행복했다. 잔칫상에 차려진 요리 중 첫 젓가락이 가던 음식은 열이면 아홉은 잡채였다. 당면의 부드러움과 쫄깃함, 거기에 더해진 고기와 갖은 채소의 식감, 그리고 고소한 참기름 향은 천상의 맛이었다. 어렸을 때부터의 강렬한 인상 때문인지 지금도 좋은 날 맞이하게 되는 상차림에 잡채가 없으면 허전함을 느낀다. 평일에 한창 밖에서 근무하다 점심 식사를 위해 들어간 식당에서 밑반찬으로 잡채가 보이면 내 몸 어디에선가 엔도르핀이 생성되는 느낌이 들곤 한다. 잡채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나만의 감정은 아닌 것 같다. 17세기 조선시대에 궁중연회에서 처음 선보였다고 하는 잡채는 그때부터 잔칫상에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 되었다고 하니, 한국인에게 있어 ‘기쁨’을 책임지는 대표적인 음식이 아닌가 싶다.
잡채의 원래 모습은 그 이름처럼 다양한 채소를 채 썰어 볶아서 담고 그 위에 즙액과 천초·후추·생강가루를 뿌린 것이었다고 한다. 옛 기록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것을 보면, 각종 버섯·도라지·시금치·고사리·두릅·숙주나물·미나리·오이·무 등 다양한 재료가 잡채를 만들 때 사용되었다고 하니 그 모습이 잘 상상되지는 않는다. 광해군이 주최한 궁중연회에서 첫 등장하였고, 이를 준비했던 인물이 왕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니 세상에 화려하게 선을 보였다 할 수 있다. 그 이후 오랜 기간 왕족과 양반과 같은 사회 고위층 중심으로 즐길 수 있었던 음식이었을 것이다.
한편으론 이렇게 다양한 재료가 사용된 만큼 서민들이 평상시에 모두 준비해서 만들어 먹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1900년대 초반부터 당면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저렴하게 구입이 가능한 당면이 잡채의 재료 중 메인 역할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때부터는 보통 사람들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식이 되었다.
상류층의 잔치 음식이 대중화가 되면서 보통 사람들도 기쁜 일이 있을 때 잡채를 마음껏 맛볼 수 있게 된 것을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 정신의 실천사례라고 얘기하면 너무 과한 것일까?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된다.’는 얘기도 있는데, 기쁜 일이 있을 때 더욱 기분 좋게 하는 음식인 잡채로 인해 사람들이 느끼는 기쁨의 크기가 두 배보다 더 커질 수 있게 된 것이기도 해서 올바른 방향으로 진화 발전한 것은 맞는 것 같다.
내 인생의 기쁨의 순간을 함께 했던 한 접시 수북 담긴 풍미 그 자체, 잡채. 이미 한식을 접한 외국인들이 선호하는 음식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설문조사도 있었는데, 앞으로도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를 바란다.
로(怒) : 화난 일이 있을 땐 속 시원히 풀어주는 한식, 떡볶이
무언가 계획했던 일이 잘 안 풀리거나, 이런저런 일로 스트레스를 받아 열 받는 날이 종종 있다. 이러한 날이면 화를 풀기 위해 나도 모르게 확 당기는 맛이 있다. 바로 매운맛!‘이열치열’이라 했던가? 마음속 여기저기 난 불에 맞불 작전을 벌이듯 뜨거운 불맛 음식을 먹다 보면 화가 다스려지는 것 같다.
매운맛 음식은 많지만, 어렸을 적 넉넉지 않은 주머니 사정에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떡볶이다. 학교 앞 분식점이나 포장마차의 거대한 은색 철판 안에서 보글보글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는 빨간 국물에 담긴 밀떡과 어묵은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영혼까지 당기는 매력이 있다. 학교에서 열심히 수업을 듣고 나오는 길에, 학원에서 늦은 시간까지 공부하고 나오는 길에 연두색 플라스틱 접시에 듬뿍 담긴 떡볶이를 친구와 함께 이쑤시개로 찍어먹으며 수다를 떨다 보면 어느새 하루의 피로가 풀리는 듯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로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는 길에 식사를 차려 먹기는 피곤하고, 뭔가 하루 동안 쌓인 마음의 짐을 풀어내고 싶을 땐 떡볶이가 생각나곤 한다. 어렸을 적엔 잘 도전하진 못했지만, 혀가 아릴 정도로 매운 고춧가루 맛이 느끼면 쫄깃한 떡을 먹다 보면 어느새 기분이 좋아진다. 순대, 김말이, 튀김 만두까지 취향에 따라 떡볶이 국물에 찍어 먹으면 요즘 말로 ‘텐션 업’이 제대로 된다. 게다가 데일리 와인까지 한잔 같이 하다 보면 한국과 서양 문화의 조화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한국 전통요리에 관심이 많으신 어머니는 주말에 아들내미가 집을 올 때면 좋은 음식 먹이고 싶다며, 떡볶이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궁중떡볶이를 해주실 때가 있다. 간장 베이스로 갖은 야채와 떡 등이 어우러진 모습은 격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쌀떡, 당근, 버섯, 오이, 양파, 소고기 등의 재료는 오색 찬란하고, 이들을 한 입 가득히 넣고 음미하다 보면 오감이 충족되는 듯하다.
떡볶이는 사실 처음엔 어머니가 해주신 것과 같은 형태였고, 궁중과 사대부에서나 즐기던 고급 요리였다고 한다. 가래떡 외에 전복, 해삼, 돼지고기, 소고기 등이 재료로 활용되었다고 하니 일반 서민이 쉬이 만들어 먹기 어려웠을 것이다. 고추장과 값싼 밀가루 떡이 주재료가 되고 분식장려운동의 영향을 받아서 대중화가 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떡볶이가 많은 사람들이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음식의 대명사이기도 해서 그 변화가 극적이다. 이러한 변화는 이 시대 보통사람 중 한 명으로서 매우 기쁘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스트레스를 받아 힘든 순간들이 있을 텐데, 이를 화끈하게 풀어줄 수 있는 매운맛 떡볶이를 많은 사람들이 애용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떡볶이가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한 형태로 변신을 거듭하고 있는 것도 긍정적인 모습인 것 같다. 쌀이나 밀가루 떡 그 자체도 매력적인데, 떡 안에 치즈가 들어가기도 하고, 모양이나 색깔도 다양해져서 입뿐만 아니라 눈까지 호강시킨다. 떡볶이의 맛과 외양을 더욱 다채롭게 하는 사리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전통적인 부재료인 어묵, 달걀, 면 외에 차돌, 파채, 통오징어 등이 추가로 들어가기도 한다. 소스도 간장이나 떡볶이 외에 짜장, 카레, 로제 소스가 활용되기도 한다. 화를 다스리기 위해 먹게 되었는데, 떡볶이는 만드는 이나 먹는 이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샘솟게 하는 도깨비방망이 같은 음식인 것 같다. 다양한 매운맛 떡볶이가 우리 한국인뿐만 아니라 세계인의 화를 저 멀리 날려버리고, 새로운 열정을 끌어낼 것이라 믿는다.
“오늘 혹시 가슴 답답하고 무언가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다고요? 떡볶이를 추천합니다!”
애(哀) : 슬픈 일이 있을 땐 기운 차리고 일어서게 해주는 한식, 육개장
한국인은 정이 많기로 소문이 났다. 기쁨은 나누어 배로 만들고, 슬픔은 나누어 반으로 나누는 것을 적극적으로 실천한다. 타인과의 관계를 소중히 하기에 지인의 경조사를 챙기는데 많은 신경을 쓴다. 특히 슬픈 날 함께 하는 것을 더욱 중시 여긴다. 어려울 때 도움을 주는 이가 진정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전 세계를 힘들게 하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 거의 2년째 이어오고 있다 보니, 경조사를 함께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많은 분들이 아쉬워하는 것은 쉬이 볼 수 있다.
타인과의 관계를 소중히 하다 보니 어느 때보다도 슬픈 날은 가까운 이를 떠나보낸 날이다. 이런 날 접하게 되는 대표적인 한식 중 하나는 육개장이다. 우리나라 장례식장에서 조문 온 분들에게 육개장을 대접하게 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 우선 예로부터 붉은 기운은 액운을 막고 귀신의 침입을 막아준다는 믿음이 있어서 고추기름으로 빨간 국물이 베이스가 되는 육개장을 문상객에게 대접했다고 한다. 그리고 육개장은 그 시초가 몸보신을 위해 탄생한 개장국에서 유례 된 것인데, 문상을 위해 멀리서 찾아온 손님의 건강을 챙기기 위해 준비한 음식의 의미도 있다고 한다. 동방예의지국다운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 같다. 마지막은 생활의 지혜 같기도 한데, 장례식은 통상 며칠 동안 이어지다 보니, 음식들을 신선하게 보관하기 어려울 수 있어 육개장을 준비한 것이라고도 한다. 갖은양념에 푹 익힌 육개장은 잘 상하지 않고, 오래 우릴수록 깊은 맛이 올라와 먹기에도 좋다. 이는 마치 장례식장에 슬픔을 함께 하기 위해 찾아온 문상객들이 소중한 관계의 사람임을 뜻하는 것처럼, 육개장은 오래될수록 진국을 맛볼 수 있고 정성도 느껴진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어찌 보면 한스러운 일을 겪었을 때 포기하고 뒤돌아서기보다는, 어디에선가 희망의 단초를 찾아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위대한 한국인의 민족정신이 녹아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 생각 없이 먹을 때는 맛있는 음식 중 하나라 생각했는데, ‘식객’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육개장에 담긴 한민족 역사의 의미를 보고 울컥했던 기억이 있다. 영화 속에서 순종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 주권을 잃은 슬픔에 탄식하며 식음을 전폐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순종의 마음을 헤아리고 궁중에서 임금의 음식을 만들던 대령숙수는 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순종에게 육개장을 요리하여 올린다. 식음을 전폐하였던 순종은 대령숙수가 올린 육개장에 담긴 조선의 혼과 한을 깨닫고는 눈물을 흘리며 남김없이 깨끗이 비웠다고 한다. 소고기는 살아서 묵묵히 일하고 죽어서는 주인에게 육신을 남기는 소같이 성실하고 충심이 가득한 백성의 삶을, 매운맛의 고추기름은 조선의 굳센 기개를, 토란은 외세에 흔들리지 않은 강한 의지를, 고사리는 들풀처럼 끈질긴 자생력의 민초의 삶이라는 조선의 혼과 한을 의미하기에 흘린 눈물이 아닐까 싶다.
인류가 계속되는 한 우리 삶에서 슬픈 일은 언제고 겪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우리가 과거에 경험했던 고난의 역사도 다시 반복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좌절하지 말고 육개장을 먹으면서 음식의 영양분을 통해, 음식에 담긴 의미를 통해 심신의 배터리를 100%까지 채우고 일어설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세계 도처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마음의 위로를 전하면서 기운을 차릴 수 있도록 돕는 대표적인 한식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락(樂) : 먹는 것 자체가 즐거운 한식, 쌈
평상시 먹는 백반 차림상에 쌈 하나만 추가되어도 진수성찬이 된듯한 기분이 드는 건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 같다. 쌈의 위력은 대단하다. 온갖 채소가 쌈의 재료로 사용이 가능하고, 어떤 부재료와 함께 해도 어울리기 때문에 모든 것이 정답이라고 할 만큼 다양한 조합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특히나 쌈을 좋아하셨다. 상추와 쑥갓에 김이 솔솔 올라오는 흰 밥 한 숟가락 듬뿍 올리고, 제육이나 삼겹살에 엄마표 고추장을 더해 아이 주먹 만한 쌈을 만들어 맛깔나게 드시곤 했다. 거기에 된장찌개까지 더해지면 임금님 밥상 부럽지 않게 행복해하셨다. 그 모습을 보고 자라서인지 방송 프로그램에서 “한입만~”을 외치며 쌈을 만들어 먹는 연예인의 먹방 장면을 보면 나도 모르게 아버지를 떠올리며 옛 추억에 잠길 때도 있다.
쌈채소는 정말 다양하다. 적생채, 꽃상추, 케일, 커리, 비트, 오크립, 깻잎 등 갖은 생채소를 활용할 수 있다. 고기도 돼지고기, 소고기 같은 육류뿐만 아니라, 고등어구이나 참치 통조림 같은 어류, 오리 불백 같은 조류도 모두 잘 어울리고, 여기에 마늘, 고추, 파채, 무쌈 등 뭐든 더해져도 맛있다. 장도 고추장, 된장, 쌈장도 다 좋고 취향에 따라 젓갈을 넣어도 풍미를 한껏 끌어올린다. 이 뿐만이 아니라 쌈채소가 꼭 생채소일 필요가 없다. 삶은 양배추와 호박잎도 훌륭한 쌈이 되는데, 건강에도 좋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쌈은 지역마다, 집안마다, 사람마다 개성을 살려 재미있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음식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쌈은 우리 한민족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한 음식이 아닌가 싶다.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중국 대륙, 북방민족, 바다 건너 일본 그리고 서양과 통하는 위치에 있다. 이들과 접해있으면서 만약 한쪽이 힘이 강대해지면 그쪽의 영향권 아래 속해 우리들의 본모습을 잃고 휩쓸려 갈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 영향은 받되 한민족 고유의 특성을 살리면서 조화를 이루었다. 우리의 한글, 한복, 건축물 등 문화예술 전반을 보아도 독창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주변에서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문학적 유사성과 뛰어난 과학적 특징도 가지고 있다.
음식에 있어서는 쌈이 바로 그러하다. 지금 쌈으로 즐기고 있는 재료들 중 해외에서 전파된 채소들이 많으나, 다른 재료들과 잘 어우러져 대표적인 한식으로 자리매김했다. 여러 재료들이 쌈 안에 담겨 하나가 되는데, 각각 고유의 맛을 잃지 않으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것은 아름답고 복스럽기까지 하다.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공동의 목적을 향해 서로를 따뜻하게 보듬어 준다는 느낌도 든다. 탄수화물, 단백질, 비타민 등의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할 수 있어 몸에도 좋고,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 먹을 수 있기에 과정 전체가 재미있다. 말 그래도 먹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음식. 그게 바로 쌈이 아닌가 싶다.
다른 나라에도 토르티야, 라이스페이퍼 등을 이용한 쌈 문화가 있긴 하지만, 한식 쌈이 가지고 있는 다채로움과 음식이 주는 즐거움은 더 크지 않나 생각하기에 세계에게도 널리 알려지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대미의 장식, 한국인의 밥!
이미 메인 요리를 양껏 먹어서 잠시 벨트를 풀고 쉬어야 할 만큼 배가 부르지만 뭔가 아쉽다. 이미 앞에서 먹은 음식들 때문에 내일 아침 일어났을 때 보름달처럼 부어있을 얼굴이 고민은 되지만, 수학 공식처럼 마지막 코스를 거치지 않으면 허전한 한국인의 독특한 메뉴가 있다. 바로 볶음밥이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사귄 친구들과 외식을 하다 보면 놀라는 것 중 하나가 볶음밥 문화라고 한다. 닭 볶음탕이나 부대찌개, 감자탕, 곱창구이, 해물전골 등 무게감 있는 요리를 신나게 먹고, 라면이나 우동 사리까지 추가해서 목에 차오를 때까지 먹은 것 같아서 끝난 줄 알고 젓가락을 내려놓으려고 할 즈음, 마지막에 한두 그릇의 공깃밥을 더해서 볶음밥까지 만들어 먹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한 숟가락을 먹고 눈이 번쩍 뜨일만한 맛에 다시 한번 놀란다는 것이다. 이 어마어마한 코스는 우리에겐 익숙한 풍경이지만, 개별 요리 문화가 익숙한 외국인의 눈에는 신기해 보일 수도 있겠다 싶다.
사실 이렇게 메인 요리를 먹은 후 남은 재료를 활용한 볶음밥은 그 역사는 알기 어렵다. 어쩌면 먹을 것이 부족한 어려운 시기를 살았던 우리 선인들이 메인 요리는 조금만 맛을 보고, 남는 재료에 밥 등을 섞어서 볶아 먹어 포만감을 느끼고자 한 것이 널리 퍼진 것일 수도 있다. 잘게 썬 김치, 김가루, 계란, 참기름까지 더하면 사실 하나의 요리라 할 만큼 훌륭한 비주얼이 나타나고, 살짝 누룽지처럼 팬에 달라붙은 밥알까지 긁어먹으면 세상 부럽지 않게 행복해지기도 하다. 한국인의 힘은 밥에서 나온다고 하는데, 이 볶음밥은 그 절정인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가족 모두 이 볶음밥을 사랑한다. 탕이나 전골을 먹고 나면 남은 국물과 부재료를 활용하여 밥을 볶아 먹는다. 다른 반찬 준비하기 귀찮은 날이면 묵은 김치를 활용해 김치볶음밥을 만들고 그 위에 계란 프라이를 얹어서 먹는데, 이 별미는 자주 먹어도 물리지가 않는 마법 같은 매력이 있다. 요즘은 밀키트나 냉동식품으로 다양한 볶음밥 요리를 간편하게 먹을 수도 있는데, 맛이 훌륭하긴 하지만, 만들어 먹는 즐거움을 느낄 수는 없어 먹다 보면 아쉬움이 생기곤 한다.
나의 희로애락과 함께 한 한식들이 다른 사람에게는 어떤 추억이 있을지 궁금하다. 사람들의 인생의 여정이 모두 다른 만큼 각자의 희로애락과 연결되는 음식들은 각양각색일 수 있다. 서로 그러한 추억들을 공유하다 보면 우리의 삶이 더욱 풍요롭게 되고, 즐거워지지 않을까 싶다.
- 이상 -